"핵 있는지도 모르는 놈이"…막말 오간 남북의 첫 핵협상 현장
[남북회담 사료 공개] 南측 대표 발언 한마디에 양측 동시에 책상 '쾅'
비핵화 선언 뒤에도 '영변 진실게임'으로 협상 파행
- 김예슬 기자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핵문제 토의하는 사람이 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하는 놈이 어디있나."
1992년 3월 10일 오전, 판문점 북측 통일각. 남북 핵통제공동위원회 구성·운영을 위한 6차 대표접촉에 나선 남측의 대표인 임동원 당시 통일원 차관이 '벌컥'하며 책상을 쳤다. 순간 맞은편에서도 '쾅' 책상을 치는 소리가 울렸다. 북측의 대표로 나섰던 최우진 외교부 순회대사였다.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최우진 : 어디 야, 어디 책상을 쳐!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임동원 : 핵문제 토의하는 사람이 핵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하는 놈이, 어디…….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최우진 : 야! 어디 책상을 쳐!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임동원 : 왜 소리 지르고 야단이야!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최우진 : 어디 책상을 치는 거야!
두 협상 대표의 공방은 이내 옆으로 튀었다. 역시 남측 대표로 회담에 임한 공로명 외교부 외교안보연구원장(전 외교부 장관)과 북측 대표인 김영철 인민무력부 부국장도 이내 고성으로 맞붙었다.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공로명 : 왜 그럼 거짓말해? 이사람들이 이거.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김영철 : 무슨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공로명 : 가만히 좀 듣고 있어.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김영철 : 당신 뭘 알아!
가감 없는 회의록의 기록은 당시엔 공개되지 않았다. 이날의 격렬한 말다툼 뒤 북한은 최우진 대표의 명의로 남한이 '핵문제 해결'을 지연시키고 있다는 취지의 비난 입장을 냈고, 한겨레신문이 이를 보도(1992년 3월 12일 자)한 것이 언론에 남은 기록의 전부다.
통일부가 30일 공개한 남북 핵협상 회의록 3836쪽에는 1991년 12월부터 1993년 1월까지 32차례 진행된 남북간 핵 관련 협상장의 분위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전문가들이 "역대 모든 남북회담 중 가장 격렬한 협상"으로 평가해 온 이 협상장의 기록이 처음 공개된 것이다.
충돌의 발단은 영변 핵시설이었다. 6차 대표접촉에서 북측은 사찰 시한을 명시하지 말고 핵통제공동위원회를 먼저 발족시키자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최우진 대표가 영변 핵시설의 수준에 대해 "조그만 원자로 하나"가 전부라는 식의 발언을 반복하자 임동원 대표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자기들이 영변에 어떤 핵시설을 갖고 있어서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사람하고 얘기할라니 정말 답답하구만.우리는 내 손금을 본 듯이 훤히 알고 있어요, 과학 장비를 통해가지고. 가장 최신예 장비, 옛날 것부터 축적된 장비를 다 알고 하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대표들이 그쪽 대표가 모르고 나오니 이게 문제가 있지 않는가 이거예요.
북측은 이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임 대표의 발언이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가 후에 어떤 비난을 받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최우진 대표는 이를 '자격 시비' 논란으로 맞받았다. 자신이 전권을 받고 나온 대표인데 '모르는 것'이 있다는 시비를 거는 것은 무례하다는 논리였다.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최우진 : 그러면 나 대표 그만두라?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임동원 : 아니, 알고 그러는지.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최우진 : 똑똑히 말해보라요.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임동원 : 알고 그러는지, 알고도 억지로 그러는지.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최우진 : 이제 대표 자격까지 논의했(하)는데.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임동원 : 영변에 핵시설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최우진 : 내가 더 잘 알어, 내가 더!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공로명 : 왜 그럼 없다고 그래. 안 했다고 그래?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김영철 : 무슨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em class="article_content_endem">공로명 : 당신 뭘 알아!
소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 북측 김영철 대표가 이 문제를 공식 제기했다.
김 대표는 "임동원 선생이 우리 최우진 대표를 보고 '영변 자료도 모르는 놈, 영변 자료도 모르는 놈'이라 했다. '모르는 놈'이라는 말이 대화 역사에 없는 일이다. 녹음을 재생하고 대화 기록에 공식으로 남겨야 한다"라고 말했다.
임동원 대표는 즉각 "흥분을 해가지고 얘기하는 중에 놈이라고 그랬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놈이라고 그랬다면 내가 그 사과를 드린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임 대표는 "과거에 남북회담에서 이런 얘기들이 가끔 있었는데, 뭐 개소리. 이런 소리도 과거 있었던 걸로 제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거는 결코 온당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라며 과거 북측의 막말 발언도 상기했다. 남북이 자존심과 각자의 이익을 걸고 '담판'을 지었던 치열한 협상 과정에서 나타난 역사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yeseul@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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