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 군사합의'는 죽었는가? : 문서의 부활이 아닌 정신의 재구성 [기고]

최근 '9·19 군사합의' 복원에 대해 말들이 많다. 한쪽에서는 남북 간 군사합의를 원래대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이미 합의는 사문화되었으니 복원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그러나 복원하느냐 마느냐의 단선적 논쟁은 본질을 비껴간다. 중요한 것은 합의문 자체가 아니라, 남북관계에서 군사 문제를 선제적으로 다루어 정치적 신뢰를 만들어냈던 9·19 합의의 '정신'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다.
2018년 '9·19 군사합의'가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선언문의 내용에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다. '9·19 군사합의'는 경제문제를 앞세워 남북관계 진전을 이루어 왔던 과거의 합의가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자 군사 문제를 앞세운 선군(先軍)적 발상의 전환이 가져온 결과물이다. 지‧해‧공 상호적대행위 중지 및 완충구역 설치, JSA 완전 비무장화와 GP 시범적 철수, 남북 공동유해 발굴 등은 모두 새로운 평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았다.
남북 군사 문제 해결을 앞세워 남북관계와 비핵화, 북미관계가 상호 동행하고 긍정적으로 병행하여 선순환 구조를 만들면서도 남북관계가 비핵화와 평화체제, 북미관계 개선으로 나아가는데 촉진제 역할을 했다. 남북관계에서 군사 문제 해소가 단순한 뒤따르는 부속물이 아니라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한 사례였다. 그러했던 '9·19 군사합의'에 다시금 생명을 불어넣을 방법은 없는가?
현재의 남북관계와 한반도가 직면한 안보 환경은 2018년과는 다르다. 국제질서의 급변 속에 북한이 '적대적 두 국가관계'를 내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남측이 일방적으로 '9·19 합의'의 복원을 선언한다고 해서 합의의 효력이 되살아나는 것도 아니다. 기존 합의의 복원이란 상호주의를 전제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우고 있는 북의 아무런 반응이나 교감 없이 이처럼 산산이 깨어진 9·19 군사합의를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모순이다. 단순히 정치적 합의 복원을 요구하는 방식으로는 실효성 있는 긴장 완화를 확보하기 어렵고 원상 복원이란 무의미하다.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평화의 시작이었던' 9·19 군사합의'를 존중하기에 포기할 수도, 과거를 그리워 만 할 수도 없다. 훌륭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9·19 군사합의'가 지금 우리 곁에 없는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자기반성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서의 복원이 아니라,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가능케 했던 '9·19 군사합의'의 정신을 전략적으로 재설계하는 것이다. 복원 불가능한 합의 조항을 되풀이하는 게 아니라, 군사 문제를 다시 평화 정치의 전면에 세울 수 있는 전략적 구상이 필요할 때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략적 평화 관리'다. 남북의 정치적 입장이 달라도 군사적 충돌 방지, 정보 투명화, 위기관리는 상호 이익이자 국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공공재다. 합의 복원이 아니라 선제적이고 부분적인 군비통제 조치의 축적을 통해 신뢰를 복원하고 실질적 긴장 완화를 되살려야 한다. 남측이 대규모 기동훈련·사격 일정을 사전 통보하고, 동·서해 특정 해역을 시범 완충 수역으로 설정하며, 접경지역 우발충돌 방지 규칙을 공개하는 조치는 북의 동의 없이도 가능하다.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현실적인 조정 방안도 첫 단추로 작동할 수 있다. 군사적 조치는 전쟁을 막기 위한 것이어야지, 전쟁을 불러오는 시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교하게 재설계된 선제적 군사 조치는 양보가 아니라 억제의 실효성을 해치지 않고 대화 공간과 외교 여지를 여는 전략이다. 이러한 선제적 조치들은 ‘탈상호주의’ 방식으로 설계되어야 하며 상대가 호응하지 않더라도 이행이 가능하고 국내외적으로도 투명성을 가질 수 있다.
이와 함께 인도주의·재난 대응을 결합한 저위험–고효과 조치들을 병행하면 국민의 평화에 대한 체감 효과도 높아질 수 있다. 홍수·질병 대응, 이산가족 화상 상봉, DMZ 유해 발굴 등은 제재 예외로 추진할 수 있으며, 군사적 신뢰와 인도주의적 협력이 맞물릴 수 있는 사안들이다.
'9·19 군사합의'를 되살리는 길은 문서의 부활이 아니라 군사 문제를 선제적으로 다루는 전략적 평화 관리의 리셋이다. 군사적 신뢰와 위기관리 메커니즘을 먼저 복원하고 축적할 때 남북관계 재개의 문은 열릴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비핵화를 위한 북미대화와 같은 비현실적인 정치적 빅딜이나 선언이 아니라, 군사 문제를 먼저 다루는 '입구 만들기'의 전략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한반도 평화의 길로 가는 현실적 입구이자 경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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