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25주년 기획] ②울산대 교정에 울려 퍼진 '민주화 함성'

1987년 6월항쟁 당시 울산대학교 학생들이 학교 정문 부근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맨 앞에 서서 무리를 이끌고 있는 학생이 지금의 울산중구의회 부의장인 신성봉 의원이다. / 사진제공=신성봉 울산중구의원 © News1
1987년 6월항쟁 당시 울산대학교 학생들이 학교 정문 부근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다. 맨 앞에 서서 무리를 이끌고 있는 학생이 지금의 울산중구의회 부의장인 신성봉 의원이다. / 사진제공=신성봉 울산중구의원 © News1

울산 6·10항쟁의 주역으로는 당시 울산대학교에서 일어났던 학생운동권도 빼놓을 수 없다.

비록 당시 총학생회는 투쟁에 소극적이었지만 단과대 학생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거리투쟁을 이끌었다. 당시 인문대 부학생회장으로 현재 울산 중구의회 부의장인 통합진보당 신성봉(52) 의원도 그 때 그 거리투쟁에 서 있었다.

◇항쟁의 시작- 2·울산대학교 민주화운동울산대 85학번인 신 부의장은 그 전까지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다 학생운동으로 재적을 당한 뒤 울산대학교에 다시 들어온 상황이었다.

때문에 당시 같은 학년들에 비해 나이가 훨씬 많았던 신 부의장은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묵살하고 일체의 개헌논의를 금지시킨 ‘4·13호헌조치’를 발표하자 신현주 당시 총여학생회 회장 등 10여명과 함께 남구 신정동 제일교회에 밤늦게 모여 호헌철폐 유인물 작성 및 거리투쟁을 결의했다.

이 때 함께 했던 사람이 현재 같은 통합진보당 권순정 전 중구의원(당시 자연과학대 부학생회장)을 비롯해 김태곤 자연과학대 학생회장, 사회과학대 김인식 학생회장·박미아 부학생회장, 김창원 서클연합회 회장 등이었다고 한다.

지난 13일 울산중구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신성봉 부의장이 기억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함께 시위를 했던 지인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 News1 이상길 기자

취재를 위해 지난 13일 오전 중구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신 부의장은 “당시 총학생회 차원에서의 투쟁을 요청했지만 무산되면서 단과대 학생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투쟁을 계획하게 됐다”며 “그 때가 4월 말쯤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울산대학교에서도 곳곳에 유인물이 뿌려졌고 학교정문 등에서는 이들 단과대 학생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거의 매일 거리투쟁이 진행됐다.

신 부의장은 “당시 선봉에 서서 학생 시위대를 많이 이끌었는데 그 때문에 경찰서 정보과에서 내 사진을 찍어 우리 부친께 찾아와 사진을 건네면서 ‘아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데모나 하고 다닌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며 그 때를 회고했다.

권순정 전 중구의원도 “다행히 경찰이나 전경들에게 잡혀서 끌려 간 적은 없었지만 당시 거의 매일 거리투쟁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권순정 전 중구의원 / 사진제공=울산중구의회 © News1

김창원 당시 서클연합회 회장도 “거리투쟁을 하다가 6월25일쯤인가 경찰들에게 붙잡혀 그토록 열망했던 6·29선언은 지금의 울산중부경찰서 유치장에서 맞이했다”며 그 때를 떠올렸다.

현재 민주통합당 당원이기도 한 김 씨는 지난 4·11총선 때 같은 당 남구 갑 후보였던 심규명 현 울산시당위원장 선거사무실 사무장을 맡기도 했었다.

이들 학생들은 시내 중심가를 주둔지로 뒀던 정치권 및 재야종교계, 이른바 울산 국본과도 연락을 취하면서 공조했다.

울산 국본과의 연락은 주로 신현주 총여학생회 회장이 맡았는데 당시 울산 국본 공동집행위원장이었던 한수호 비전울산포럼 부회장은 “기억에 남는 학생 가운데 ‘신현주’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눈에 띠게 열심히 활동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통민당 경남2지구당 조직부장이었던 김위경 (사)아시아태평양환경NGO한국본부 회장도 “지금도 기억나는데 ‘신현주’라는 여학생이 열심히 했다”며 “그래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당시 총학생회 회장에 대해 여자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우리끼리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신현주 총여학생회 회장은 6·10항쟁을 통해 처음 만난 당시 울사협 소속이자 울산 국본 재야종교계 연락책이었던 박종희 책임간사와 나중에 결혼, 다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6·10항쟁이 낳은 커플인 셈이다.

울산대학교에서 이뤄진 민주화운동과 관련, 당시 울산대 학생이었던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과 천병태 울산시의원도 맹렬히 거리투쟁에 참여한 대표적 인물이다.

김 청장은 뉴스1과의 전화통화에서 “87년 5월에 막 군대를 제대한 상태여서 당시 학생회 일은 맡지 않고 있었다”며 “대신 복학을 앞두고 거리투쟁에 매번 참여했었다”고 회고했다. 김 청장은 이후 울산대학교 문화패를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학내 민주화추진위원회에도 참여했다.

천 의원도 “6·10항쟁 이전 해인 86년 여름에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고 얼마 뒤 6월 항쟁이 일어났다”며 “비록 학생회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학교 근처와 시내에서 벌어진 시위에 자주 참가했었다”고 말했다.

울산시의회 이재현 부의장이 지난 12일 의원사무실에서 6ㆍ10항쟁 당시를 떠올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 News1

이처럼 울산의 6월 항쟁은 ‘울산 국본’과 ‘울산대학교 학생운동’이라는 두 개의 큰 축으로 나뉘어 진행됐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노조가 없었던 탓에 가장 막강한 노동자 세력에서는 조직적인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다만 당시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노동자였던 현 울산시의회 이재현 부의장과 이상범 전 울산 북구청장, 사영운 전 현대그룹해고자협의회 의장, 고 권용묵 뉴라이트신노동연대 대표, 오종쇄 전 현대중공업 노조위원장 등 일부 노동자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면서 이후 울산에 노동운동을 뿌리내리는데 적잖은 동력을 얻게 된다.

지난 12일 오전 울산시의회 의원사무실에서 만난 이재현 부의장은 “그 때까지만 해도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이 일반적이지 않아서 그 전부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조금씩 준비 중이었던 소수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거리투쟁에 자주 참석했었다"며 "그 때 당시 함께 했던 사람이 사영운 전 현대그룹해고자협의회 의장을 비롯해 이상범 전 북구청장, 고 권용묵 뉴라이트신노동연대 대표, 오종쇄 전 현중 노조위원장 등"이라고 말했다.

이상범 전 북구청장도 "당시에도 현대자동차를 다니고 있었는데 일하다 허리를 다쳐 쉬고 있던 터라 허리에 무리가 올까봐 전면에 나서지는 못하고 뒤에서 시위대에 가끔 참석했었다"고 그 때를 회고했다.

또 현재 청주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사영운 전 의장도 "조직적으로 한 건 아니고, 노동운동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과 함께 중구 성남동 코리아나 호텔 앞에서 주로 거리투쟁에 참석했었다"고 밝혔다.

김승석 울산대학교 교수가 지난 13일 교수연구실에서 6ㆍ10항쟁에 참여했던 이야기를 하고 있다. © News1 이상길 기자

또 학계에서도 이렇다 할 조직적 움직임은 없었다. 다만 지금도 울산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승석 교수 등 일부 교수들이 개인 자격으로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지난 13일 교수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사실 울산의 6월 항쟁에서 학계가 조직적으로 기여한 바는 없다”며 “다만 나와 몇몇의 교수들이 함께 민주화를 위한 거리투쟁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투쟁’ 첫 번째로 ‘울산 국본의 거리투쟁이야기’가 이어집니다.

lucas021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