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 화려했던 과거…지금은 '도시의 흉물'
지지부진한 '세운지구재정비촉진계획'…상인들 '고통'
발길 끊긴 상가, 매출도 반토막…리모델링 해결 '글쎄'
세운전자상가. © News1
2006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대대적으로 발표한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이 방향을 잃고 긴시간 우왕좌왕하는 사이 상인들은 만성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2015년까지 세운상가 일대를 철거하고 1km의 대규모 녹지축을 조성한다는 야심찬 계획은 2009년부터 부동산 경기 침체로 고비를 맞았다. 거기다 문화재청이 세계문화유산인 종묘 앞에 고층건물을 짓는 계획에 제동을 걸자 세운상가 재개발은 사업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최근 서울시는 세운상가와 그 일대를 재개발하겠다는 기존 계획을 변경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세운상가를 존치 후 리모델링하고, 주변 일대는 개발규모를 다양화해 재정비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뒤바뀌는 재개발 정책에 세운상가 상인들은 고통의 시간만 늘어가고 있다. 상인들은 "시간지체가 상권을 죽이고 있다"며 시의 확실한 입장을 촉구했다.
◇사람 발길 뚝…매출도 반토막
세운전자상가. © News1
재개발사업이 지지부진해지면서 그나마 있던 사람들 발길도 눈에 띄게 줄었다. 매출도 자연히 줄었다. 재개발계획 발표 전 3억까지 올라갔던 권리금은 이미 바닥을 쳤다. 휑한 세운상가는 상인들의 고통으로 가득 채워졌다.
22일 오후에 세운상가에서 만난 상인들은 "사업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매출이 반토막났다"고 입을 모았다.
사람이 북적 거려야 할 상가는 텅 비어 있었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 탓인지 상가전체가 얼어붙은 듯 했다.
1층부터 3층까지 미로처럼 복잡한 상가 내부를 구석구석 살펴봐도 물건을 둘러보는 손님을 찾기 힘들었다.
분주해보이는 가게는 열에 한 두곳 정도. 왁자지껄 물건과 흥정이 오가야 할 거리는 고요했다. 늘상 있는 일인듯 가게 안 상인들은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1979년부터 세운상가 4구역에서 산업조명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강성복씨는 세운상가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세운상가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봤다.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은 세운4구역. © News1
용산전자상가 등 다른 전자상가들이 생겨났을때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외환위기가 터졌을때, 어렵긴 했지만 강씨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청계천 복원 사업에 이어진 세운상가 재개발 계획. 그리고 7년여간 기약없이 흐르고만 있는 세월. 강씨는 턱없이 모자란 보상금이라도 받고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날 생각이다.
"저기 보세요. 사람이 하나 없어" 강씨가 가게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죽지못해 사는거에요, 정말."
가게 앞 줄줄이 늘어선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4구역은 이미 88%정도 보상절차가 이뤄져 대부분의 상인들이 빠져나갔지만 공사는 아직 착공도 못했다. 나머지 12%는 보상금 협의를 하지 못해 계속 남아있다.
한때 종업원 세 명을 고용했던 강씨는 지금은 혼자서 일한다. 언제 보상이 이뤄질지 몰라 무조건 기다리는 마음은 착잡하다. 서울시가 올 6월 보상 협의에 나설 것이라는 '떠도는 이야기'만 믿고 있다.
◇화려했던 과거…지금은 '죽음의 도시'로
지금은 '도시의 흉물'로 전락한 세운상가지만, 이곳에도 화려했던 시절이 있었다. '세상의 기운이 이곳에 모이라'는 뜻의 세운상가는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8년 국내 첫 주상복합상가로 완공됐다.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엘리베이터까지 갖춘 '최첨단 건물'이었다. 많은 사회 유명인사들이 입주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아시아 최대 규모 전자상가였던 세운상가에서는 어디서도 구할 수 없었던 수입 전자제품을 만날 수 있었다.
청계천을 따라 쭉 늘어진 상가에서 '사람을 만들어낸다', '인공위성도 쏠 수 있다'는 우스갯 소리가 돌 정도였다.
아시안게임, 88올림픽 때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세운상가는 점점 쇠퇴하다 근래에는 바닥까지 내려갔다. 강씨의 표현대로 '죽은 도시'가 돼버린 것이다.
재개발 계획이 발표되고나서 금방 상가가 사라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재개발을 하지도 안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상태가 계속됐다. 세운상가가 없어진 줄 아는 시민들도 많다.
강씨를 비롯한 대다수 상인들은 새 고객의 주문을 받아본지 오래됐다. 십여년간 알고지낸 몇몇 단골들에게만 간간히 연락이 온다. 하루에 2건 주문을 받으면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다.
한창 잘나갔던 때에는 돈을 펑펑쓰고도 30만원(80년대 대기업 초봉 월 20만원)이 넘게 남았지만 지금은 월세를 감당하기도 벅차다.
세운청계상가 일대(산림동). © News1
세운청계상가 바로 옆에서 1997년부터 공업사를 운영하고 있는 박모씨는 "시간을 끌수록 상권이 죽어간다"고 말했다. 그 역시 새로운 손님을 본지 오래다. 단골이나 알음알음 연락하는 손님이 전부다.
박씨는 세운상가 일대가 다시 활성화되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사업이 연기되는 동안 다른 지역 상권이 발달했고, 재개발 후 다시 가게를 연다해도 자리잡는데까지 5~10년이 걸린다는 것이다.
박씨는 "재개발을 하던 안하던 피해는 온전히 상인들만 떠안는다"고 푸념했다.
시끄럽게 돌아가야할 기계들은 박씨 옆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기름때로 얼룩져야할 그의 손은 깨끗했다. 박씨는 금년이 고비라며 "돈을 번다는 생각은 애초에 접었다"고 말했다.
◇세운상가 문닫은 줄 알아…"아직 건재"
세운전자상가. © News1
"그냥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어요. 이젠 재개발, 리모델링 얘기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요"
40년째 세운상가 2구역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신현호씨는 얘기를 꺼내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신씨는 "지금은 (재개발) 안한다고 하지만, 박원순 시장 임기도 14개월여 밖에 안남았잖아요? 후에 다른 시장이 집권하면 얘기가 또 달라지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소연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계획안이 바뀌거나 (언제 공사가) 실시될지 예측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신씨는 리모델링 변경안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리모델링을 한다고 상권이 살아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서울시가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녹지축을 만든다고 할때부터 이미 상가는 동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신씨는 "진짜 필요한 것은 리모델링이 아니라 세운상가가 아직 있다는 걸 시민들에 알리는 정책"이라고 강조했다.
남진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교수도 같은 부분을 지적했다.
남 교수는 "리모델링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상권이 살아날 지는 의문"이라며 "세운상가가 문닫은 줄 아는 시민들이 많다. 영업이익이 떨어져 피해를 본 부분을 세세히 조사해 상가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남 교수는 이어 "도시계획정책이 오락가락하지 않으려면 정책수립 초기단계에서부터 주민들이 참여해야한다"면서 "강력한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동시에 주민들도 행정정책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방적인 통보보다는 주민과의 협의를 통한 정책 수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울시 관계자는 "예전에는 (도시계획을 수립할때) 절차에 따라 주민 의견만 수렴하고 위원회에서 결정했던 부분도 있다"면서 "하지만 최근에는 주민들과 자주 면담하고, 공청회도 여는 등 의견을 적극적으로 듣고 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주민 공감대가 높아지면 계획의 확실성이 높아져 (도시정책이) 쉽게 바뀌는 상황은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는 4월 중으로 '2030 서울도시계획헌장(가칭)'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 헌장에는 '도시계획정책자문단'의 논의를 거친 '서울시 도시계획 기본 원칙'이 담긴다.
시에 따르면 헌장 발표는 큰 원칙이나 기조에 맞춰 일관성 있는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시의 자구책이다. 향후 시는 헌장을 바탕으로 도시계획을 수립·집행하게 된다.
앞서 시는 도시계획헌장을 논의하기 위해 2012년 8월 도시계획, 건축, 교통분야, 미래학 등 전문가 20여명을 '도시계획정책자문단'으로 위촉했다.
ms88@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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