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터전 떠나라니"…을지로 지하상가 상인·위탁업체 '대립'
상인 "생존권 위협" vs 업체 "정당한 절차 따른 공사"
서울시 "수의계약→경쟁입찰 전환 진통"
'상권 지속성' 고려 부족하다는 지적도
을지로 2~6가 지하보도 상가의 개·보수를 둘러싸고 상인, 민간 개발업체, 서울시 등 이해당사자들의 대립이 심각하다.
을지로 지하상가 내 총 164개 점포 중 100여개 점포 상인들은 개·보수 공사기간에 영업을 할 수 없는 데다 공사 비용을 자신들이 부담해야 한다는 이유로 공사를 반대해왔다.
시간이 지나며 최근 상인들이 공사에 응했으나, 일부는 법적 소송까지 마다하지 않겠다며 야간 천막 농성에 돌입했다.
반면 2011년 7월 시설관리공단으로부터 위탁 관리·운영 계약을 맺어 상가를 관리해 온 민간업체 대현프리몰(대현)은 위탁받은 공사를 절차에 따라 진행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측 또한 2008년부터 서울 전역 29개 지하도 상가의 계약방식을 기존 수의계약(비경쟁 임의계약)에서 경쟁입찰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공사는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55억의 비용이 소요되는 이번 공사는 '지하상가 편의시설 등 설치조건부 사업'으로 을지로 2~6가 지하상가의 보도타일과 천정 등을 교체하는 것이다. 총 공사기간은 1월20일부터 8월30일까지다.
을지로 2가 상인들 중 일부는 12일 밤부터 야외 농성을 시작했다. 지난달 20일부터 대현에서 공사를 위해 칸막이를 설치하고 있는데, 이를 막기 위해 농성에 돌입한 것이다.
배재훈 을지로지하상가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 부위원장은 "상가를 지키기 위해 10~15명 상인들이 영업 종료 이후 새벽까지 가게 앞에 비닐을 쳐놓고 자고 있다"며 "농성에 실제로 참여한 상인은 전체 중 일부지만 92.7%의 상인들이 원천적으로는 공사에 반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배 부위원장에 따르면 을지로 2가에서 야외 농성이 이어지자 대현은 을지로 3가 쪽부터 칸막이를 설치했다.
배 부위원장은 "1월 말 공사중지를 요청하는 가처분 신청을 냈다. 대현은 최소한 가처분 신청 결과가 나올 때까진 공사 진행을 미뤄야하는 게 아니냐"며 "나가고 싶어도 대현에선 위약금을 물라고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상인 김모(57)씨는 "종업원 임금이나 퇴직금, 손님 관리 등 문제가 있기 때문에 (공사로) 장사를 몇개월 쉬면 사실상 다시 시작해야한다"며 "더구나 보행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멀쩡한 타일을 뜯는 공사 자체가 납득이 안된다"고 말했다.
비대위는 공사 반대라는 기본 입장 하에 박원순 서울시장의 중재를 요구하고 있다.
배 부위원장은 "평소 불필요한 보도블럭 공사를 반대하는 박 시장이 '지하' 보도블럭 공사에는 왜 손을 놓고 있느냐"며 "공단과 대현이 책임을 미루고 있는 상황에서 시가 적극적으로 나서야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또 다른 상인 B(46)씨는 "공사가 끝나면 임대료도 오른다 하니 기본적으로 어느 상인이 찬성하겠냐"면서도 "하지만 절차에 따라 칸막이를 설치를 한다고 하니 어쩌겠느냐"고 말했다.
◇대현프리몰 "법적으로 정당한 공사…물리적 충돌은 피할 것"
대현은 공단으로부터 2011년 7월 상가 운영을 위탁받았다. 이후 대현은 상인들과 '개보수 공사비 전부를 개별 임차인(상인)이 부담하는 대신, 계약을 최대 10년까지 연장한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대현은 1월20일부터 본격적으로 상가 공사에 돌입했다. 공사는 8월 말에 끝날 예정이다.
최근 칸막이 설치를 시작한 후 상인들과의 갈등이 고조되는 것에 대해 대현 관계자는 "우리는 시설관리공단으로부터 위탁받은 공사에 대해 정당한 절차에 따라 계약을 했다"며 "서울시와 상인들의 중간에서 법적인 테두리 내의 공사를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공사에는 우리 뿐 아니라 시설관리공단, 공사 하청업체 등 여러 주체의 계약이 얽혀있어 공사가 중지되면 계약 상 손실이 난다"며 "만약 상인들이 낸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인다면 공사를 일시중지해야겠지만, (가처분 신청 인정이) 공사 자체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고 말했다.
또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이면 정식 재판 절차를 밟겠다"며 "현재 농성을 하는 상인들과 물리적 충돌이 나진 않도록 최대한 조율을 거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보도 면적 30%에 불과한 상점을 운영하는 우리가 공사비 전액을 부담하느냐'는 상인들의 불만에 대해서는 "서울시가 시내 29개 지하보도에 대해 똑같이 추진하는 것으로 안다"며 "이는 우리가 답할 내용은 아니다"고 말을 아꼈다.
대현은 상인들에게 점포 면적에 따라 공사비를 책정했으며, 계약 기간을 넘기고 공사에 응하지 않는 상인들은 내쫓을 방침이다.
다만 공사 비용을 부담하는 업체에게는 계약기간을 5년 연장했다. 공사비 또한 10년동안 분납하도록 상인들을 배려해줬기 때문에 공사를 미룰 수도 없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지하상가 경쟁입찰 전환 원칙"
공단과 서울시는 이번 일에 대해 30년 이상 수의계약으로 상점임대가 이뤄졌던 기존 관행을 경쟁입찰 체제로 바꾸는 과정에서 뒷따르는 진통이라고 보고있다.
시 측은 민간 수탁자에게 이미 운영권을 위탁했기 때문에 업체와 상인들 간 갈등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
공단 관계자는 "공개 입찰 없이 오랫동안 장사를 해온 상인들 입장에선 경쟁 입찰로의 수순인 공사를 반대할 수 밖에 없지 않겠냐"며 "대현이 맡은 공사를 (상인들이) 반대하는 게 능사만은 아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2008년께부터 시의회를 비롯해 시민, 권익위 등에서도 지하상가 임대료를 현실화하고 경쟁입찰을 도입하라고 권고했다"며 "물론 상인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을지로 외) 다른 상가에서는 이를 받아들였고 을지로에서 일부 상인들이 아직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계약이 끝났고 공사를 원하지 않는 상인들이 상가를 떠날 때 (대현과의 계약 상) 물어야 하는 위약금에 대해서는 공단과 시에서 중재하는 중"이라며 "계약의 법적 효력 때문에 시 측이 위약금을 없애라고 강요할 순 없지만 없애거나 줄이라고 권고한다"고 했다.
'보도 면적 일부를 차지하는 상인들이 공사비 전액을 부담하는 건 부당하다'는 핵심 논란에 대해서 서울시는 "수익자 부담 원칙에 따른 것"이라고 해명했다.
시는 "지하보도에서 상가면적은 30%지만 (공사를 통해) 편의시설이 지하보도에 들어서면 그 편익이 점포주의 매출증대에 기여할 수 있다"며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따라 편의시설 설치공사에 동의하고 재입점한 임차인이 임대료 형식으로 부담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밝혔다.
시 관계자는 "지하상가는 공공시설이고 최근 5년 간 을지로 지하상가에 시 재정 70억원 정도가 투입됐다"며 "을지로 상가 임차인들은 민간관리기간을 포함해 30년 이상 수의계약 형식으로 영업을 했고 2008년도에 상인들의 사정을 고려해 3년간 연장 계약을 해줬기 때문에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시내 29개 지하상가 중 민간업체가 리모델링 공사를 마쳐 5년 단위 경쟁입찰 계약을 하고 있는 곳은 강남역, 을지로 1가 지하상가가 대표적이다.
◇'일방적 진행'vs'사전 협의 거쳤다'
비대위는 공사 진행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공사에 응하지 않으면 퇴출된다는 협박만 받는다"며 "서울시나 대현과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고 있다" 주장한다.
그러나 대현은 "공식적으로 설명회도 2회 이상 열었고, 때때로 소식지와 안내문 등을 발송했다"며 "상인들이 원하면 직원들이 나가 설명도 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민원, 서울시 SNS, 전화 등으로 상인들의 불만이 쏟아지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시는 상가운영을 민간에 위탁한 상황인데다 경쟁입찰로 전환한다는 원칙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상인들에게 일일이 대응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해명했다.
최근 을지로 지하상가 공사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자 시는 23일 일부 상인들과 박 시장과의 만남인 '시장과의 대화'를 연다.
시장과의 대화에 참여한 상인들은 상가 공사를 최대한 줄여 영업 피해를 최소화할 것을 촉구할 전망이다.
하지만 현재 야간 농성을 벌이고 있는 상인들에 대해서는 "원만하게 해결하겠다"는 원론적 방안 밖에 없어 근본적인 숙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한편 2008년 지하상가 입찰방식 전환에 대한 시 주최 토론회에 참여했던 김은희 도시연대 사무처장은 '상권 지속성' 개념에서 이번 일을 바라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사무처장은 "공사를 거친 후 임대방식을 공개입찰로 하는 게 원칙적으로는 필요하지만 5년 주기 계약 하에서 어느 상인이 공동체 의식을 갖고 장사를 할 수 있겠냐"며 "주인이 자주 바뀌면 상권은 오래 못가고 쇠락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기존 상인들이 영업을 하는 권리를 인정해주되, 상인들이 전대(계약 후 또 다른 이에게 임대)를 통해 임차 수익을 벌거나 권리금을 주장하는 관행은 사라져야한다"며 "상인들도 이에 대한 자정 노력을 해야하고 시 쪽에서도 경제적 이해관계는 물론 상권 지속성에 대해 주목해야한다"고 조언했다.
최근희 서울시립대 도시행정과 교수는 "국가 재산이 들어가는 지하상가는 원칙적으로 공개경쟁입찰이 필요하다"며 "그래야 정부 재정 회수 효과도 있고 불법임대나 권리금 등 관행도 점차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eriwhat@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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