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까지 3대 걸쳐 '독립의 불꽃'…증평 연병호 가문의 항일운동
곡산 연씨 가문 형제, 딸, 사위, 외손녀까지 독립유공자
- 장예린 기자
(청주=뉴스1) 장예린 기자 = 3·1 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진 지 107년, 충북 증평군의 작은 마을에는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이어온 가문이 있다.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곡산 연씨 일가로 형제와 딸, 사위, 외손녀까지 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했다. 가문의 중심에는 독립운동가 연병호 선생(1894~1963)이 있다.
연병호 선생은 1894년 11월 22일 도안면 석곡리에서 태어났다. 초명은 병학, 호는 원명이다. 독립운동 시기에는 병학과 병준 등 다양한 이름으로 활동했다.
청안의 사립 중명학교를 거쳐 1913년경 형 연병환 선생이 있는 중국 북간도 용정으로 건너가 중등과정인 창동 학원에 입학했다. 16세 연상인 형은 그에게 독립사상을 일깨워줬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조용주, 안재홍 등과 함께 대한민국 청년외교단을 결성했다.
그의 노력으로 충주와 괴산, 대전에 지부가 설립됐고, 동지들과 자신의 주장을 담은 건의서를 임시정부에 제출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결성을 지도했다.
1920년 상하이로 간 그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동포들이 독립운동에 동참하기를 촉구하는 글을 독립신문에 기고했다. 1933년 충청도의원에 선출돼 임시의정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7년 상하이에서 '이갑녕 저격 사건' 연루자로 붙잡혀 국내로 압송됐고 '적색운동의 최고 간부'로 몰려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8년 형을 선고받았다.
1944년 출옥 후 고향에서 제헌국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확립에 노력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당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는 선전 벽보를 인쇄할 여유조차 없어 신문지에 붓으로 쓴 선전 벽보를 부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연병호 선생은 1963년 1월 26일 별세했다. 그가 남긴 유품은 두루마기 한 벌과 고무신이 전부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1963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의 형 연병환(1878~1926) 선생은 1910년대 초 세 아우를 독립운동에 나서도록 이끌었다. 독립군의 자금과 무기를 조달하다 일제에 체포돼 2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연병호 선생의 독립 정신은 후손으로 이어졌다.
조카 연미당(1908~1981)은 1930년 상해 여자청년동맹과 상해 각 단체연합회 결성을 주도하며 선전과 홍보 활동에 주력했다.
1938년에는 남편 엄항섭과 함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선전공작 활동을 펼쳤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그의 남편 엄항섭(1898~1962)은 김구 선생이 작성한 선언문과 각종 글을 번역·정리하는 등 최측근 참모로 활동했다.
1940년 임시정부 중경 정착 후 선전부장을 맡고, 광복 후 김구와 함께 환국했다. 그는 환국 후에도 김구의 곁을 떠나지 않고 보필했다.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연미당·엄항섭의 맏딸 엄기선(1929~2002)도 부모의 영향을 받아 어린 나이에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해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해방 후 3·1여성동지회 대전지회장을 지내며 사회복지 활동에 헌신했다. 이후 1993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이들의 숭고한 독립운동사는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연병호 항일 역사공원과 생가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이성인 해설사는 "한 가문에서 형제와 조카, 사위, 외손녀까지 3대에 걸쳐 5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며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헌신과 숭고한 희생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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