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 괴담’을 아시나요

[맹모, 제주에 가다 - 이진주의 탐라일기·6]
서울 '마마토모'에서 제주 '맹모'가 되기까지

편집자주 ...서울대 국어교육과와 같은 대학원 언론정보학과에서 공부했다. 서울에서 중앙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지난해 남편과 제주로 내려와 두 아들을 키우고 있다. 왕년의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성과 모성에 관심이 많다. 도 닦듯 엄마 노릇을 마친 뒤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독립할 작정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학교를 짓고, 어린 아이들을 가르치며 동화를 쓰는 것이 꿈이다.[편집자주]

서초동 법조타운의 초등학생들이 서로 부모자랑을 했더랍니다.

“얘들아, 우리 엄만 변호사다.” “야, 우리 아빤 검사야.” “조용히 해. 우리 아빤 판사야.” 듣기만 하던 한 아이가 빙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엄만 이 학교 선생님인데.” 선생님 댁 아이가 이 논쟁의 승자였다죠.

요새 이른바 ‘갑을관계’에 주목하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일반인 사회에선 변호사가 잘나 보여도 법정에 서면 판검사보다 을이 되고(그 자체로 법조계의 슈퍼갑인 대형 로펌은 빼고요.), 갑 중의 갑으로 기세등등한 법관 역시, 자녀들의 선생님 앞에선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어떤 부모든 “새끼가 볼모”인 죄로, 선생님께는 항상 을일 수밖에요.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두사부일체’, 아니지 참, ‘군사부일체’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의 학부모들에게, 아직 선생님은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지난 스승의 날, 제주국제학교에선 간단한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학생들은 선생님들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직접 만든 카드를 전달했지요. 그러나 이날, 많은 한국학교들은 재량휴업일을 선언하고 교문을 닫아 걸었습니다. (사진=이진주)

괴담이란 무엇인가요? 진실성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과장된 뜬소문입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이 과도하거나 실체가 불분명할 때 창궐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보육기관의 부재(“중국인 이모가 아이를 납치해 어쨌다더라” “어린이집에서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먹인다더라”),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공간의 부족(“키즈카페에서 사고가 나 아이가 죽었다더라”), 다른 계층의 교육에 대한 반감(“영어유치원 엄마들이 홍콩 가서 쇼핑할 때 아이가 실종됐다더라”), 학원 뺑뺑이에 지친 아이들(“대치동 아이들은 스타크래프트 밴에서 먹고 자고 한다더라”)까지... 두 아이를 키우며 주워들은 수많은 괴담들을 보면, 한국 사회의 육아와 교육은, 가히 괴담을 낳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엄마들 사이에 널리 퍼진 스승의 날 괴담도 그렇습니다. 갑 중의 갑인 선생님께 선물이라도 잘못 했다가는, 새끼가 불이익을 받게 될 거라는 공포... 여기가 바로 괴담의 진원지입니다. “이 엄마가 나를 무시하나?” 선생님께 한 번 찍힌 아이는 반장 선거에도 나갈 수 없고, 경시대회 수상도 물 건너 갑니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가시 돋친 꾸중을 듣거나, 억울하게 매를 맞거나, 순식간에 문제아로 몰릴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초딩 시절까지는, 선생님은 교실의 왕이니까요. 아이의 스펙에, 무엇보다 영혼에, 생채기가 나는 거죠. 이 말은 반대로, 돈 쓰는 엄마의 아이가 실력 있는 다른 아이의 자리를 가로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가 자랄 때, 혹은 그 이전부터 학교 현장에서 빈번히 벌어졌던 일들이지요. 경험에서 비롯된 엄마들의 두려움이, 스승의 날 괴담을 만듭니다.

한 강남엄마가 담임선생님께 매스티지(중저가의 대중적인 명품) 브랜드인 ‘M’사의 지갑을 선물했답니다. 샤넬이나 루이뷔통 같은 조금 더 급이 높은 명품을 기대했던 선생님은 아이에게 지갑을 돌려주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시장 다닐 때 쓰시라고 해라.” 이 괴담의 다른 버전은 이렇습니다. 어떤 분당엄마가 역시나 대중적인 명품 브랜드인 ‘C’사의 패브릭 가방을 선물했답니다. 천 쪼가리가 마음에 들지 않은 선생님은 그 가방을 교실 뒤에 걸어두며 말했다고 합니다. “얘들아, 우리 이거 분실물 수거함으로 쓰자.” 아이 눈높이에 맞춰 손수건을 보냈더니 아이 목에 둘러매 돌려보냈다는 둥, 명품 버전의 변용은 무궁무진합니다. 어설프게 선물해봤자 망신만 당한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반에선 학부모들이 돈을 모아 아예 수백만 원대 가방을 선물한다는 소문도 있답니다. 믿거나 말거나요.

현금을 찔러 넣었다가 퇴짜 맞은 엄마의 소문도 돕니다. 한 엄마가 고심 끝에 봉투에 수표 3장을 넣었습니다, 30만원이었죠. 봉투를 확인한 선생님은 아이에게 돌려주며 말했답니다. “엄마 콩나물 사시라고 해라.” 열 받은 엄마는 학교를 옮기면서 30만원어치 콩나물을 싣고 와서 운동장에 뿌렸답니다. 왜 하필이면 콩나물이었는지, 콩나물 30만원어치가 얼마나 되는지 가늠은 잘 안 됩니다만.

소구리가 다녔던 서울 학교에선, 스승의 날 주간, 학교 보안관 아저씨가 엄마들의 가방을 검사했습니다. 물론 교장 선생님의 묵인 하에 이뤄진 일이었지요. 테이크아웃 커피나 수제 쿠키 같은 ‘약소한’ 먹을거리는 괜찮았지만, 그 외의 선물들은 교문을 통과할 수 없었습니다. 제과업계의 ‘명품’인 김영모 빵집에서 커다란 과자세트(로 짐작되는 물건)를 사들고 왔던 엄마 한 분이 격하게 반발하는 모습도 목격했습니다. 보안관 아저씨 말씀으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엄마들의 열성’을 도무지 막을 길이 없다는 겁니다.

수제쿠키를 구워 파는 학교 앞 카페 언니는, “어떤 엄마들은 ‘쿠키상자 안에 다른 선물을 넣을 테니 공간을 만들어달라’고 하더라”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선물 위에 쿠키를 덮는다는 거지요. 아니 마약 밀수도, 정치자금 배달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헐~ 뛰는 맘, 그 위에 나는 맘, 베이베 베이베, 나는 뭘 좀 아는 맘!

제주국제학교의 스승의 날

이런 괴담들이 쌓이고 쌓여서, 엄마들의 불신도 커져만 갔습니다. 급기야 스승의 날을 학교장 재량 휴업일로 삼고, 아예 교문을 닫아 거는 학교들이 늘어날 정도로요. 제주도 그렇더군요. ‘요구리’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며 보니, 평일인데 이른 아침부터 놀이터에 커단 형아들이 나와 노는 겁니다. 스승의 날이라 학교를 쉰답니다.

한국학교들은 죄 노는 5월 15일, 오히려 제주국제학교에서는 ‘스승의 날’ 행사가 열렸습니다. 학생들이 전날 방과 후 모여 만든 카네이션 코사지를 가슴에 달아드리고, ‘스승의 은혜’를 불렀다지요. 행사는 철저히 아이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녀석들이 준비한 선물은 꽃 한 송이와 카드, 딱 그뿐이었어요. 학년별로 종이를 오리고 붙여서 만든 커다란 카드는, 조악하면서도 자기들 나름의 진정을 담고 있었습니다.

외국인 선생님들에게 스승의 날이란 매우 생소한 풍경이었을 텐데요, 미국에서 30년 간 교편을 잡으셨던 한국계 교장선생님이 전근 다니신 학교마다 전파한 전통이라고 합니다. 미국에선 아이들이 꽃을 달아드리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는 분도 계셨대요. 제주국제학교의 선생님들도 무척 신기하고 놀라워 하셨답니다. 그 30년 동안 한국학교의 스승의 날은 처참하게 망가져왔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셨지요. 이런 교장선생님의 진심과는 별개로, 엄마들은 미리 겁 먹었던 게 사실입니다. 5월 초 스승의 날 행사 공지를 받기도 전에, 엄마들의 카카오톡 대화창에는 불이 났지요. (카톡!) “그냥 넘기긴 좀 섭섭하지요?” (카톡!) “아무래도 그렇죠. 꽃이라도 해야지.” (카톡!) “개인적으로 하면 안 되겠죠?” (카톡!) “그럼요, 큰일 나요. 우리 조금씩 걷어서 단체로 해요.” (카톡!) “선물은 얼마짜리를 해야 돼요?” (카톡!) “비싼 건 안돼요. 3만 원 이하가 좋겠어요.” (카톡!) “에고, 3만 원 짜리 뭘 사지요?” 학교에서 온 메일에는, 선물은 간단한 쿠키나 초콜릿 정도만 허용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엄마들은 고민 고민하다 결국 3만 원짜리 우산을 사드리기로 했습니다. 학교 근처 박물관에서 파는 명화 프린트 우산이었어요. 비 많은 제주의 생활을 잘 견디시란 뜻이었죠. 다른 반도 고만고만한 꽃과 선물들을 챙겼다고 하고요. 3만 원 짜리 선물. 대치동 같으면 엄마 혼자 했다고 해도 어쩌면 민망한 금액일 텐데, 이걸 정말 반 전체 엄마들이 드려도 될까? 이제와 고백합니다만, 저는 끝까지 망설였습니다. 임원 엄마들만이라도 티 안나게 얼마씩 더 걷을까? 그게 더 이상할까? 몰래 사비를 보태 꽃바구니라도 살까? 그러다 말이라도 나면 어떡하지? 에라, 그냥 말자... 담임선생님께 우산을 전달하기까지, 제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갈등이 벌어졌는지 몰라요. 그런데 선생님은, 어? 정말 그 우산 하나만 받고도 환히 웃으시더라고요. 휴, 외국 선생님들은 다르다더니, 진짜 괜찮은가보다. 그제야 안심이 됐습니다.

이렇게 무사히 스승의 날을 보내다니, 이상했습니다. 이게 정상인데, 그동안 왜 그렇게 불편한 날들을 보냈을까요? 왜 학교가 하는 말을, 선생님을 믿지 못했을까요? 자식놈 선생님 선물 고민하느라, 정작 제 어버이, 제 스승님은 못 챙기고 넘긴 것도 부끄러웠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저도, 엄마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멘토도 있는 사람인데 말예요. 애 데리고선 끼니도 못 챙겨 먹는다는 게 변명이 될까요. 섬이라 선물 고르기가 마땅찮았다고 하면 핑계가 될까요. 애엄마인 채 사람 노릇하며 살기, 참 힘듭니다.

좋은 쌤, 나쁜 쌤, 이상한 쌤

서울 학교에서 만났던 멘토 엄마는 말했습니다. “할 만한 사람들이 안 하면 괘씸죄 걸리는 거 알지만, 소구리 엄마, 우린 그런 거 하지 맙시다. 돈 주고 내새끼 바보 만드는 일이에요. 우리 엄마가 선생님한테 ‘쥐약’ 쳤구나. 애들이 그거 모를 줄 알아요? 아이는 선생님 의심하고, 선생님은 애 비위 맞추고, 그런 놈이 자라서 뭐가 되겠어요? 위의 두 놈, 그런 거 안 하고 키우니, 지들이 고생은 좀 했어도 선생님 눈치 봐 가며 알아서 사회화가 됩디다. 그것도 산 교육이에요.”

그 엄마는, 교육에 대한 고민이 아주 많은 분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큰아들을 키울 때 직접 대안학교까지 차리셨을까요. ‘할 만한 사람들’이란 그런 뜻이었어요. 개중에 좀 사는 집, 아이가 좀 똘똘한 집, 이른바 반장 부반장 일등 이등 엄마들 말입니다. 할 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제주국제학교에서, 3만원 짜리 선물로 스승의 날을 보냈다는 건, 어찌 보면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 정도의 자제력이라면, 앞으로 제주에선 우리 교육을 변화시킬만한 긍정적인 실험이 계속될 수 있을 겁니다.

일전에 <왕따와 학교폭력> 이야기를 할 때요, “아이를 키우면서, 제 속의 상처 입은 아이도 함께 키운다”는 말씀을 드렸잖아요. 5월이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제가 학교 다니며 만났던 선생님들이 떠오르더군요. 그러니까 좋은 쌤, 나쁜 쌤, 이상한 쌤들 얘깁니다.

영화 <완득이>의 괴짜선생 ‘똥주(김윤식 분)’는 주인공 도완득(유아인 분)의 천적입니다. 처음엔 ‘나쁜 쌤’내지 ‘이상한 쌤’으로 보였던 이 양반은, 알고 보니 학교라는 서식지에서 거의 멸종해 가는 ‘좋은 쌤’이었죠. 꼴찌 완득이의 필리핀 엄마(이자스민 분)를 찾아주는가 하면, 완득이가 야자를 빼먹고 킥복싱 연습을 하도록 도와주거든요.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매번 학교에 얽힌 나쁜 기억부터 떠올렸으니, 이번엔 좋은 쌤 이야기부터 먼저 할까 봐요. 초등학교 5학년 때, 한 시골학교에서 ‘제 인생의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당시 아빠는 누군가에게 배신당해 사업을 말아 잡숫고, 집도 절도 날린 채 시골에 내려가 요양을 하셨습니다. 와신상담이라면 너무 거창하고요, 작은 목장을 지어 세를 놓고 허리 병이나 고치며 세월을 낚는 수준이었죠. 장미 정원이 딸린 방배동 이층집을 떠나, 산업도로변에서도 한참 떨어진 외딴집을 보았을 때, 저는 철없이 외쳤습니다. “아빠, 우리집 망한 거예요?” 그러나 아이들의 회복탄력성이란 놀라워서요, 저희 삼남매는 아빠가 만들어주신 연못에서 가재를 잡고 오리를 키우는 삶에 금세 적응했습니다.

시골이라고 치맛바람이 왜 없었겠어요. 과수원집 지주아들 OO, 목사님댁 범생이 XX 등등, 동네에서 주름깨나 잡는 아이들이, 거기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엄마는 애들이 아무리 요란해도, 학교에 왔다 갔다 하는 분이 아니셨지요. 어느 정도냐면, 장대비가 쏟아져도 우산 한 번 안 갖다 주셨을 정도였어요. 비를 쫄딱 맞고 독감에 걸리거나, 우산이 있는 친구를 꼬여 집에 데려 오거나, 어디선가 비를 긋다 오는 것 모두가 저희의 선택이었습니다. 생활이 너무 바쁘다는 게 이유였지만, 이제와 생각해 보면, 선생님이나 다른 엄마들을 마주치는 게 불편하셨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왜? 그 때 엄마는 드릴 것이 없었으니까요. “매일 박카스를 마시지 않으면 기운이 나질 않는다”며 은근히 압박하던 선생님도 있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촌놈들에게 “윈덱스(유리창 닦는 용액)니 물왁스니 하는 도시의 청소용품들을 사오라”며 달달 볶는 선생님도 계셨거든요.

그런데 이웃 중소도시에서 전근 오신 유명숙 선생님은 달랐습니다. 시골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문집을 만들어주셨고, 새로 나온 동화책을 구해 모두가 읽도록 하셨습니다. 옥수수나 밤송이나 벼이삭 같은 것으로 환경미화를 하신 솜씨는, 요즘 유행하는 영국식 인테리어 같았어요. 바구니에 장식한 과일을 배고픈 누군가 슬쩍 했는데, “우리반에 인쥐가 있구나.” 하며 웃고 마셨죠. 이게 웬 전설의 고향 같은 얘긴가요.

그때 저희 반에는 가정형편이 어렵고 지능이 약간 모자란 남자아이가 하나 있었는데요, 쌤은 그 아이에게 끝내 한글과 구구단을 가르치셨습니다. 선생님이 손으로 녀석의 코를 닦아 주실 때, 더럽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요. 선생님도 멸시하지 않는 친구를 저희가 감히 어떻게 차별할 수 있었겠어요. 당신은 우릴 골고루 사랑하셨던 겁니다. 생전 학교 한 번 오시지 않는 엄마가 제 손에 텃밭 상추를 들려 보내셨고, 그걸로 친구들과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학년을 마칠 때 그 아이 할머니가 오셔서, 선생님께 거듭 절하며 많이 우시던 모습도요.

나쁜 쌤 얘기는 이렇습니다. 바로 그 선생님이 엄마 아빠를 간곡히 설득한 덕분에, 저는 6학년 때 강남 한복판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얼마나 무리하셨을지, 짐작이 되시죠. 그러나 6학년이면 이미 모든 학교 권력이 완성된 시점입니다. 뒤늦게 끼어든 저는 학교의 방외인이었습니다. 공부는 그럭저럭 했어도 발언권은 갖지 못하는 조용한 아이 말예요.

담임 쌤은 체육을 전공한 미남이셨습니다. 글씨를 어찌나 잘 쓰셨는지 지금도 서체가 눈에 훤하네요. 농담도 잘하고 무엇보다 아주 젊으셨지요. 그러나 불행히도 중심세력 아이들만을 눈에 띄게 편애했습니다. 그 중 리더인 여자아이는 선생님과 거의 친구라도 먹은 듯 스스럼이 없었는데요, 쌤 무릎에도 앉고 불량식품도 나눠 먹는 수준이었습니다. 선생님이란 조금 멀찍이서 공경해야 하는 줄 알았던 제게는, 가히 문화적 충격이었죠.

그 아이는 선생님의 신임을 등에 업고서 아이들을 지배했습니다. 제게서 동시를, 다른 아이에게서 그림을 가져다 숙제를 내기도 했죠. 요샛말로 하자면 저는 ‘숙제셔틀’이 될 뻔했던 겁니다. 제 통지표에 “문학에 소질 있습니다” 라고 쓰셨던 눈 밝은(?) 선생님은, 그 아이의 것이 아니란 걸 눈치채시고도, 그걸 벽에 붙여 놓으셨어요. 그 뒤로도 친구는 계속 시를 써달라고 졸랐습니다. 심지어 학급문집에 실릴 글까지요. 우정과 우정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는 얼마나 얄팍한가요.

얘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나쁜 쌤으로까지 기억하진 않았을 겁니다. 이번에도 학년을 마치고, 졸업식 날이 돼서야 엄마는 학교에 나타났습니다. 선생님께 드릴 작은 선물을 들고서요. 그 때 선생님이 능글능글 웃으며 말씀하셨다고 해요. “아이고, 이걸 어쩌죠? 어머니 오실 줄 모르고 제가 체육에 ‘미’를 줬는데.” 제 성적표의 유일한 미는 이렇게 얻어진 거였습니다. 소구리처럼 진짜로 체육을 못했던 거 아니냐고요? 체육은 저희집 곰서방이 파이였고요, 저는 소싯적에 100m를 12, 13초에 뛰는 ‘달려라 하니’였는 걸요.

학년 말에나 등장하는 엄마 덕분에, 이런 에피소드는 종종 생겼습니다. 그 중 압권은 이겁니다. “학교에 하도 안 나오셔서 어디 몸이 불편한 분이신 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 때마다 속이 뒤집어지셨으면서도, 참 꿋꿋이 원칙을 고수하셨죠. 선생님 ‘인사’는, 학년 말에 한 번만! 덕분에 제대로 ‘괘씸죄’에 걸려 일 년 내내 눈칫밥 먹으며 고생하기도 했고, 참 스승을 만나 지금껏 마음의 인사를 드리고 있기도 합니다. 어린 여제자들의 교복 앞섶을 훔쳐보는 이상한 쌤들 얘기는, 더 안 해도 되겠죠? 그랬다가는 서슬 퍼런 청와대 대변인도 날아가는, 2013년이니까요.

수생목(水生木), 수다목부(水多木腐)

오행에서 ‘수생목(水生木; 물은 나무를 살린다)’이라더니, 물이 좋은 곳이라선지 제주엔 나무가 많습니다. 물만큼이나 땅도 볕도 좋아서, 이파리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더군요. 그런데 말이지요, 수생목이 아니라 수극목(水克木; 물이 나무를 극한다)인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수다목부(水多木腐), 지나치게 많은 물이 나무를 썩게 만드는 경우지요. 썩은 나무는 땅에 깊이 뿌리 내리지 못하고, 물 위에 동동 뜹니다. 물가에서 자라는 건 거목이 아니라 이끼나 고사리입니다.

고사리는 얼핏 보기에 늠름한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생겼습니다. 그러나 양지에서 자라는 커다란 나무가 아니라 습습한 음지에서 자라는작은 풀일 뿐입니다. 수생목(水生木)이라지만, 물이 지나치게 많으면 나무는 나무가 되지 못하고 썩어 문드러집니다. 부모의 넘치는사랑이, 내 아이를 고사리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경계할 일입니다. (사진제공=위키피디아)

자녀교육에 대한 어버이들의 관심도 그렇습니다. 내 새끼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학교 괴담이 생기고, 스승의 날 괴담이 생기고, 아픈 아이들도,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도 생깁니다. 자식을 위해 뭐든지 다해주고 싶은 엄마 아빠는, 선생님께 뇌물을 바쳐서라도 아이에게 우호적인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애씁니다.

20년 전에도 저희 학교에는 선생님에게 과외를 받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웃 학교에서는 재벌가 딸의 체육 성적을 조작해 내신 등급을 뒤바꿔놓은 일도 벌어졌지요. 압구정 모처에서는 교사가 시험문제를 유출해 학교가 발칵 뒤집어진 사례도 있었습니다. 알음알음 어린 저희에게 알려진 것들이 그러했으니, 숨겨진 예는 더 많을 겁니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닙니다. 당장은 그 친구들이 부당하게 유익을 얻은 것 같아도, 그런 식으로 학교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오래 버티지 못합니다. 학교를 벗어난 20대 이후 인생의 진경이 펼쳐질 때, 결코 자신의 힘으로 달릴 수 없을 테니까요. 헬리콥터 부모의 지나친 사랑이, 아이를 망치는 선명한 예입니다.

다음엔 모자계의 명품 ‘헬렌 카민스키’ 찜 쪄 먹는, 시장표 꽃모자 쇼핑기를 한 번 써볼까 합니다. 제주오일장에서 파는 꽃모자 쓰고, 섬 고사리 뜯으러 한 번 나가봐야겠어요. 제 사랑이 소구리를 고사리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끊임없이 경계하고 의심하면서 말입니다.

주말 내내 비가, 온다고 해요. 아파트를 감싸고 도는 귀곡성 같은 바람 소리를 전하며, 이만 접을까 합니다. 섬 밖에서는, 너무 습습해지지 마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