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하면 선처?…"산재 악순환 뿌리 뽑아야" 아리셀 재판장 경고
"언제 터져도 이상할 것 없는 예고된 일"
- 배수아 기자
(수원=뉴스1) 배수아 기자 = "산재가 발생하면 기업가는 막대한 자금력으로 유족과 합의를 시도하고 유족은 생계 유지를 위해 합의를 하게 된다. 결국 이런 악순환을 뿌리뽑지 않으면 우리나라 산재 발생률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므로 피고인들이 유족들과 합의했다는 사정은 일부 제한적으로 양형에 반영한다."
23일 수원지법 제14형사부 201호 법정. 중대재해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업무상 과실치사상 등 혐의로 기소된 박순관 아리셀 대표 등의 선고공판에서 재판장인 고권홍 부장판사는 피해자와의 합의가 양형요소로 크게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합의했다는 이유로 중대재해법을 과실범에 준해 약하게 처벌하는 건 중대재해법 입법취지에 반한다는 의미다.
이날 선고 후 유족들의 기자회견에서 유족들의 법률지원을 맡은 신하나 변호사도 이번 재판의 주목할 점으로 해당 부분을 꼽았다.
신 변호사는 "재판부는 자본가들이 막대한 자본을 갖고 피해자들과 합의했을 때 재판에서 선처받는 연쇄 고리가 산업재해를 줄어들지 않게 한다고 지적하면서 중형을 선고했다"며 "판시 내용에 대해 우리 사회가 곱씹어봐야 한다"고 했다.
이날 고 부장판사는 1시간40여분간 혐의별, 피고인별로 판결문을 담담히 읽어내려갔다.
고 부장판사는 경영진의 '약한 안전의식'도 꼬집었다. 고 부장판사는 "증거로 확인된 아리셀 화재 현장 작업장을 보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전지를 문 뒤에 두고 막다른 곳에서 작업한 근로자들의 모습이 위험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만일 피고인 자신의 가족이 이렇게 작업을 했다면 피고인들은 불안감을 느꼈을지 모르겠다"며 "위험에 대비하도록 안전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아 결국 소중한 가족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고 했다.
불법 파견에 대해서도 "불법 파견의 근본적 원인이 제조업체들의 인력난이라기보다는 피고인들이 납품 기일을 맞추기 위해 갑작스럽게 전지 생산량을 증가시킨 것이어서 피고인이 자초한 측면이 훨씬 크다"고 지적했다.
또 "피해자들에게 평소 화재 대피 교육을 했더라면 화재 직후 출입문 또는 비상구로 뛰쳐나가 생존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귀중한 골든타임을 놓쳤고 결국 소중한 가족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 참혹한 결과는 피해자들과 유족이 온전히 받게 됐다"고 했다.
이어 "언제 터져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예고된 일이었다"면서 "일용직, 파견직 등 노동현장의 실태가 드리워져있다"고도 덧붙였다.
고 부장판사가 양형과 관련해 "'생명 존중'은 우리 사회에 꼭 지켜야 하는 가치"라고 하자, 방청석에서 1시간 넘게 재판장의 말을 귀기울여 듣던 유족들 사이에서는 울음이 터져나왔다.
고 부장판사는 "사람의 생명은 인간의 존엄한 가치이자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고,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결과는 어떠한 것으로도 회복될 수 없다"면서 "이 사건 화재사고로 23명이 사망해 매우 중하기 때문에 그에 상응한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날 재판부는 박 대표에게 징역 15년을, 박 총괄본부장에겐 징역 15년과 벌금 100만 원을 선고했다. 지난해 2월 보석으로 석방돼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던 박 대표는 이날 법정 구속됐다.
공동 피고인인 아리셀 직원들에게는 무죄~징역 2년이 선고됐다. 이와 함께 아리셀 법인에는 벌금 8억 원, 한신다이아에 벌금 3000만 원, 메이셀에 벌금 3000만 원, 강산산업건설에 벌금 1000만 원이 각각 선고됐다.
지난해 6월 24일 경기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소재 아리셀 공장 3동 내 2층에서 발생한 화재로, 작업 중이던 23명(한국인 5명, 중국인 17명, 라오스인 1명)이 사망하고 8명이 다쳤다.
sualuv@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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