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논과 밭이 타들어 간다"...최악의 가뭄사태

"거북이 등 처럼 쩍쩍 갈라진 논과 풀풀 먼지만 날리는 밭을 쳐다보면 주저 앉아 울고 싶어요. 오죽하면 뻔히 아는 사이에 싸움질을 하겠습니까."
충남 서산시 운산면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김모(64)씨는 바짝 마른 하늘을 원망하며 이같이 탄식했다.
서산 운산면 고산리(73세대 148명)와 신장리(158세대 360명) 주민 사이에 최근 다툼이 벌어졌다. 한 주민이 서산 고풍저수지에서 나오는 물길을 돌린 것이 평소 가족처럼 지내던 이들 마을에 싸움을 불러왔다.
34년만에 몰아 닥친 가뭄으로 날카로워진 농심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목이다.
최악의 봄 가뭄이 지속되면서 전국의 농·어촌이 타들어가고 있다.
15일 기상청에 따르면 전국의 5월 평균 강수량은 46.2㎜로 평년의 37.4%에 그쳤다,
기상청이 밝힌 가뭄판단지수에 따르면 충남·북과 전북 등 중부지방 외에도 전남·강원·경북·경기 일부 지역이 ‘가뭄’ 단계를 넘어 ‘매우 위험’ 단계로 진입했다.
◇충남 전국 최악, 저수지 고갈로 농어촌 비상
올들어 15일 현재 충남 지역 강수량은 평년 대비 20% 미만인 199㎜에 그쳤다. 이는 전년도 313㎜, 평년 311㎜와 비교해 현격히 낮은 수치다.
이 같은 가뭄으로 일부 저수지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고, 최악의 경우 급수 중단까지 우려되고 있다. 도에 따르면 저수지 931곳 중 71곳이 이미 고갈됐고, 저수율 30% 이하는 308곳, 31~50% 333곳, 50% 이상 219곳이다. 4700만t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예당저수지도 저수율이 25%로 떨어지면서 비상사태를 맞고 있다.
도내 전체 논 15만5157㏊ 중 0.8%인 1308㏊가 모내기를 못 했으며, 모내기를 마친 논 중 1260㏊가 물 마름 현상을 보이면서 작황 부진을 예고했다.
밭 작물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전체 6만298㏊중 4.4%인 2661㏊이 파종을 못했으며, 파종을 마친 밭 중 1551㏊에서 시듦 피해가 발생한 상태다.
태안에서 마늘 농사를 짓고 있는 고모씨(59)는 “잎과 꼭지 모두 말라 비틀어졌다. 용케 살아난다 해도 씨알이 너무 작아 올 농사는 이미 망친 셈"이라며 한 숨을 내쉬었다.
가뭄 피해는 어장에도 마수를 뻗치고 있다.
태안반도의 대표적인 바지락 어장인 근소만 지역의 경우 바지락이 폐사하는 바람에 큰 손해를 보고 있다.
천수만 지역은 서산AB지구 담수호가 있어 그나마 낫지만, 근소만 지역은 민물유입이 거의 없어 가뭄 피해에 무방비 상태다.
인근 소원면 파도리, 법산, 소근, 의항, 송현, 신덕 등지의 바지락 어장도 일손을 놓은 채 하늘만 원망하고 있다.
도내에서 가뭄이 가장 극심한 서산ㆍ태안지역은 보령댐에서 식수를 공급받고 있다. 그러나 저수율이 25%까지 곤두박질치면서 가뭄이 지속될 경우 단수까지 우려된다.
공업용수 확보에도 비상이 걸렸다.
삼성토탈, 현대오일뱅크, 호남석유화학, LG석유화학, KCC 등 서산 지역 대기업들은 인근 대호방조제가 바닥을 보이자 아산방조제와의 직통 관로를 모색하는 등 대책마련에 전전긍긍해 하고 있다.
1일부터 상황실을 가동 중인 충남도는 서산에 5억원, 태안 4억원, 당진 1억원 등 각 시군에 총 28억1200만원의 용수원 개발사업비를 긴급 지원해 358개의 관정을 개발하고 373개의 하천을 굴착한 상태다.
이밖에 최근 농림부로부터 25억원을 지원 받아 가뭄이 지속될 경우를 대비해 관정, 들샘, 저수지 준설 등 물길을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다.
◇제주도, 10년 만에 최악의 가뭄
제주도 역시 10년 만에 찾아온 최악의 가뭄으로 농경지가 타들어가고 있다.
15일 도에 따르면 제주해안과 서귀포, 서부지역의 토양수분 상태가 100kPa(킬로파스칼)을 넘어 섰다. 제주시가 119.9kPa, 서귀포 102.8, 동부 30.7, 서부 200.7 등이다. 토양수분 상태가 100kPa를 넘으면 작물이 자라는데 지장을 주는 초기가뭄을 뜻한다.
가뭄으로 가장 피해를 보고 있는 작물은 수박, 단호박, 옥수수, 밭벼 등이다. 이들 작물을 파종한 밭은 수분 부족으로 생육이 지연돼 농민들이 발을 구르고 있다.
서귀포시 표선에 사는 장모(75)씨는 “비가 내리지 않으면 옥수수가 제대로 크질 못해 팔 수가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귀포시 예례동 현모(52)씨도 “2000평의 밭에 수박을 심었지만 이대로 가면 수확이나 제대로 할지 모르겠다”고 울상을 지었다.
도는 12일 제주시와 서귀포시에 가뭄대책 상황실을 설치, 비상체제에 돌입한 상태다.
도는 토양수분 조사를 주2회 실시하는 한편 관정·양수기·급수탑 등 가뭄대책 시설장비를 가동해 가뭄피해를 최소화할 예정이다.
강원도는 이미 3월부터 소방본부가 급수지원을 실시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
지난 3월에만 89곳을 대상으로 105회에 걸쳐 453.8t의 급수를 지원했고, 4월에는 49곳에 281.5t(61회), 5월에 65곳 410t(90회), 6월 들어서도 11일까지 42곳에 298.8t(59회)의 물을 공급했다.
춘천 지역의 강수량은 전년 동기보다 10% 가량 감소한 상태다.
춘천 송암리 노화남(69)씨는 "요즘 새벽에 한 두차례 비가 내렸지만, 농사에 크게 도움이 안된다”며 “특히 저온현상으로 벌도 보이지 않아 채소 등이 제대로 안된다”고 말했다.
원주는 판부면 금대리 한여동, 문막읍 비두리 큰만 등을'가뭄 위험지역'으로 분류해 특별 관리중이다.
기상청 가뭄판단지수에 따르면 원주,홍천,철원,강릉,삼척 등 12개 시·군은 '매우위험' 상태다. 특히 5월 이후 고온현상으로 지표 증발량이 많아 논과 밭의 수분이 부족한 상황이다.
◇ 경남 지역 밭작물 수분 부족으로 작황 부진 예상
경남 지역의 모내기는 1모작은 90% 정도로 거의 끝나가고, 지금은 보리와 밀 등을 베어내는 등 2모작 준비에 한창이다.
논물이 96% 가량 확보된 상태이나 해안가 일원의 용수 공급이 원활하지 않는 지역엔 가뭄이 계속될 경우 모내기가 힘들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농작물 피해는 아직까지 뚜렷하지 않으나 밭작물의 경우 수분이 모자라 잎이 시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6월 하순까지 비가 오지 않으면 상당부분 영농에 차질이 우려된다.
울주군 범서읍의 농민 전모(60·여)씨는 “옥수수의 잎이 안으로 말리고, 매실 등 과실들의 성장이 멈춘 상태”라고 말했다.
경남도는 6월까지 가뭄이 지속될 경우 암반굴착, 관정개발, 저수지 준설작업 등 가뭄극복 대책을 수립해 놓고 있다.
◇ 전남·북은 그나마 상황 나아
전남 지역의 경우 장성·나주·담양·광주 4대호가 57%이지만 전체적으로 65%대의 저수율를 유지하고 있어 모내기 등 영농 작업에 큰 차질은 빚지 않고 있다.
특히 고구마·고추 등 밭작물 농가 대부분이 자동 물뿌리개(스프링클러) 등 관수시설을 갖추고 있고 우려할 상황은 아니라는 것.
다만 일부 천수답이나 관수시설이 부족한 일부 산간지역 고추·고구마 등 밭작물에서의 작황부진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5월 강수량이 평년의 65.3%를 보이고 있는 전북도 댐 평균저수율이 평균 보다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상황은 조금 나은 편이다.
그러나 군산, 김제, 임실 등을 중심으로 밭작물 피해가 속속 접수되고 있다.
도 관계자는 "콩과 고구마 등 밭작물 시든 면적이 현재 80ha에 이른다"면서 "지난해와 비교해 볼 때 올해 밭작물의 생육은 70% 수준"이라고 말했다.
기상청은 전북지역의 가뭄판단지수를 '매우 위험' 단계로 분류해 놓고 있다.
전남도는 장기간 비가 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가뭄 대비 종합대책’을 수립, 단계별로 추진키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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