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개념미술은 서구의 개념미술과 동일한 형식이 (아니)다"
1970~90년대 한국미술을 언어·행위·사물·지도·기호의 변화로 재구성
국내 작가 28명 참여…국제 심포지엄·'작가의 수업' 연계 프로그램 운영
-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현대미술이 시각과 물질 중심에서 언어와 사고의 차원으로 옮겨간 과정을 조명하는 전시 '이것은 개념미술이 (아니)다'를 19일부터 10월 11일까지 서울관에서 연다. 1970~90년대 한국 개념미술을 작가 28명의 작품 140여 점과 아카이브로 살핀다.
전시는 한국 개념미술을 서구의 개념미술과 동일한 형식으로 묶지 않았다. 언어와 개념을 통한 사고가 재료와 형태, 신체 행위, 현실 인식과 교차하며 전개된 한국적 흐름을 네 개의 장으로 나눠 보여준다.
배명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관은 "이번 전시는 미술이 눈으로 인식되는 대상에서 언어와 사고의 차원으로 이행했던 한국현대미술의 개념적 전환을 조명한다"며 "특히 개념미술의 여러 특징 가운데 언어적 전환에 주목하는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 제목의 괄호와 부정형도 하나의 정의를 피하려는 기획과 맞닿아 있다. 한국현대미술에서 개념미술, 개념적 미술, 개념주의 등 여러 용어가 혼용된 만큼 작품마다 다른 의미와 해석의 층위를 열어두었다.
전시는 서울관 6·7전시실과 미술관마당에서 진행한다. 회화와 사진, 영상, 오브제, 퍼포먼스뿐 아니라 작품의 형성과정을 보여주는 기록 자료도 함께 배치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1960년대 아방가르드 한국 실험미술이 반향을 일으켰다면 그다음으로 선보일 장치가 필요했다"며 "오랜 연구와 조사를 바탕으로 첫 전시 이후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귀한 작품들도 선보인다"고 말했다.
전시는 개념미술을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사유한 복합적인 시도로 다시 읽는다. 1970~ 80년대의 언어·논리적 실험에서 1990년 전후 현실과 정체성에 응답한 개념주의까지 이어지는 변화가 중심축이다.
첫 번째 장은 신체 행위에 언어와 논리를 결합한 1970~90년대 작업을 다룬다. 우연한 몸짓을 작품으로 삼기보다 사전에 설정한 논리에 따라 행위를 반복하며 일상의 움직임을 하나의 사건으로 전환한 흐름이다.
배 학예연구관은 "1970~80년대에는 언어·논리적 실험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되묻는 작업이 활발했다"며 "1980~90년대를 지나면서 개념주의는 집단성이 와해된 시기에 현실에 응답하는 새 언어로 언급됐다"고 설명했다.
공간과 시간(Space & Time) 조형미술학회(ST) 작가들의 작업이 이 장의 출발점이다. 이건용의 '장소의 논리', 성능경의 '수축과 팽창', 김용민의 '물걸레' 등 1976년 '이벤트 로지컬' 출품작을 통해 신체와 언어, 장소의 관계를 짚는다.
김용민이 남긴 아카이브도 처음 대거 공개한다. 바닥의 젖은 수건을 비틀고 털고 접은 뒤 물기를 닦는 '물걸레'는 청소라는 목적보다 반복 행위에 내재한 성찰을 전면에 놓는다.
윤진섭의 '어법'은 1977년 제작한 17점 가운데 남아 있는 5점 중 3점을 선보인다. 당시 전시됐던 12점이 홍수로 소실된 뒤 보관돼 온 작품들로, 음절을 발음하는 얼굴과 물로 글자를 쓰는 행위를 결합했다.
김순기의 '시간과 공간 1975 퍼포먼스 드로잉', 홍명섭의 '디벨로핑-레벨 캐스팅', 코디최의 작업은 행위의 범위를 시간과 공간, 참여, 디아스포라 정체성으로 확장한다. 신체는 통일된 대상이 아니라 시간과 압박, 문화적 충돌이 새겨진 기호로 나타난다.
두 번째 장은 언어가 사물과 세계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언어와 물질을 함께 놓아 사물의 익숙한 기능과 이름을 어긋나게 하고, 그 틈에서 현실을 다시 보게 하는 작업을 모았다.
배 학예연구관은 "언어는 결국 사물의 의미나 세계의 의미를 규정할 수 있는가라는 큰 화두를 한국 작가들이 던지고 있다"며 "순수한 언어 모델로 환원되기보다 언어와 개념을 통한 사고와 재료의 형태가 함께 있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안규철의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 김범의 '풍경 #1', 정서영의 '전망대' 등은 사전적 정의와 실제 사물의 간극을 드러낸다. 문과 의자, 풍경과 지시문 같은 익숙한 요소는 본래 기능을 벗어나 삶과 예술, 인식의 문제를 환기한다.
최병소와 이승택의 작업에서는 언어를 지우고 해체하는 행위가 등장한다. 김순기의 '비데 & 오 함부르크 미술관'과 주재환의 '내돈'은 발음과 단어의 순서를 비틀어 비어 있음, 소유와 채무의 현실을 함께 드러낸다.
박현기의 '무제'와 김범의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은 돌을 언어에 응답하는 존재로 제시한다. 인간과 사물의 경계를 흔들어 언어가 인간만의 전유물이라는 통념을 되묻는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가 교차하는 혼성 언어도 주요 흐름이다. 박이소의 '자본=창의력', 코디최와 김소라, 김홍석의 작업은 번역과 오역, 소통의 실패를 통해 의미가 고정되지 않는 과정을 보여준다. 공성훈의 '개념 간의 교집합'은 1992년 제작돼 2002년 전시된 뒤 24년 만에 공개되며, 의미가 사용자와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드러낸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장은 세계를 표준화하는 지도와 시계, 숫자부터 신문·광고·통계 등 이미 유통되는 기호까지 다룬다. 작가들은 객관적 정보처럼 보이는 체계를 자르고 뒤집고 재배열해 그 배후의 위계와 권위를 드러낸다.
배 학예연구관은 "지도와 측정은 서구뿐 아니라 전 세계 개념미술에서 중요한 코드"라며 "한국 작가들은 객관성과 합리성의 전제를 의심하면서 단위와 수치를 차용하고 편집하거나 역전시켰다"고 말했다.
성능경의 '세계전도'는 세계지도를 약 300조각으로 자른 뒤 임의로 재배치해 국가와 대륙을 식별할 수 없는 평평한 지도로 만든다. 김차섭의 '바른 방향(삼부작)'은 한반도 지도를 뒤집어 서구 중심의 위아래와 중심·주변의 질서를 바꾼다.
곽덕준의 '4개의 시계', 오인환의 '만남의 시간', 이건용의 '실내측정', 박이소의 '무제(한 평)'는 시간과 길이, 면적이 절대적 기준인지 질문한다. 같은 공간의 시계가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신체와 사회적 조건에 따라 측정 단위의 의미도 달라진다.
'기호의 조정자들'에서는 성능경의 '현장 1', 김용익의 '무제(1981년 제1회 청년작가전)', 김소라의 '2007-04-03', 김홍석의 '더 토크' 등을 소개한다. 신문사진의 편집 기호, 과거 작품, 기사와 광고, 인터뷰와 자막을 재편집해 정보가 구성되는 방식을 노출한다.
윤동천의 '당신의 목소리는 힘입니다'와 오인환의 '퍼스널 애드'는 우편과 신문 광고의 유통망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관객의 메시지와 타인의 응답을 통해 미술을 물질적 대상에서 관계와 소통의 과정으로 확장한다.
전시 기간에는 '작가의 수업'을 운영하며, 8월 19일에는 국제 심포지엄 '개념과 미술: 한국과 아시아의 맥락에서'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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