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피아'의 유래일까…'시칠리아 만종 사건' 발발 [김정한의 역사&오늘]

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 만종 사건 (출처: 프란체스코 아예츠, 1846,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의 부활절에 팔레르모의 성령 교회 앞에서 울려 퍼진 저녁 기도(만종) 소리는 단순한 예배의 시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억눌렸던 시칠리아인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거대한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당시 시칠리아는 프랑스 앙주 가문의 지비를 받고 있었다. 앙주 가문의 샤를 1세는 가혹한 세금과 고압적인 통치로 원성을 사고 있었다.

사건은 프랑스 병사가 교회 앞에 모인 군중 사이에서 한 여인을 검문하면서 시작됐다. 그가 여성을 희롱하자, 참다못한 남편이 병사를 찔러 죽였다. 이 우발적인 충돌은 순식간에 시내 전체로 번졌다. 시민들은 "프랑스인에게 죽음을!"이라 외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팔레르모에서 시작된 불길은 시칠리아 전역으로 무섭게 번졌다. 시칠리아인들은 프랑스인을 식별하기 위해 '치체리(Ciceri, 병아리콩)'라는 단어를 발음하게 시켰고, 서툰 발음을 하는 이들을 가차 없이 처단했다. 이 봉기로 인해 하룻밤 사이 수천 명의 프랑스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훗날 이탈리아 범죄 조직 '마피아(MAFIA)'라는 명칭의 유래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한다. "모르테 알라 프랑치아, 이탈리아 아넬라(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a, 프랑스에 죽음을, 이탈리아는 열망한다)"라는 구호의 앞글자를 땄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민족주의적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 시칠리아인들의 저항 정신과 강한 결속력을 상징하는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 봉기로 샤를 1세는 시칠리아를 상실했다. 이후 시칠리아는 아라곤 왕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됐다. 지중해의 패권 지형이 뒤바뀐 순간이었다. 압제에 맞선 민중의 폭발력이 얼마나 거대할 수 있는지 보여준 이 사건은 오늘날에도 시칠리아 역사의 가장 강렬한 한 페이지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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