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달라이 라마, 히말라야 넘어 목숨 건 탈출 [김정한의 역사&오늘]

1959년 3월 17일

제14대 달라이 라마 텐진갸초 (출처: NIH Image Gallery,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59년 3월 17일 밤, 24세의 청년 달라이 라마는 승복 대신 평범한 병사의 복장을 하고 어깨에는 총을 멨다. 그는 중국군에 포위된 라싸를 뒤로한 채, 몰아치는 눈보라를 뚫고 인도를 향한 목숨 건 망명길에 올랐다.

1950년대 초 중국 인민해방군의 티베트 진입 이후 긴장은 끊이지 않았다. 1959년 3월 초, 중국 측이 달라이 라마를 공연 관람에 초대하며 무장 경호원 없이 참석할 것을 요구하자 티베트인들의 분노는 폭발했다. 라싸 시내는 "중국은 물러가라"는 외침으로 가득 찼고, 수천 명의 시민이 노르불링카를 에워싸며 지도자를 보호했다.

중국군의 포격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달라이 라마는 결단을 내렸다. 티베트의 상징이자 정신적 지주인 그가 체포되거나 살해당하는 것은 국가의 종말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망명단은 소수의 근위대와 가족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중국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밤에만 이동했고, 해발 5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맥을 넘었다. 세계는 그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숨을 죽였다.

탈출 14일째인 3월 31일, 기진맥진한 달라이 라마 일행은 마침내 인도 국경의 아루나찰 프라데시에 도달했다. 인도 정부는 그에게 정치적 망명을 허용했고, 그는 다람살라에 정착하여 망명 정부를 세웠다.

이 사건은 티베트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전환점이자, 국제 사회에 티베트 인권 문제를 각인시킨 계기가 됐다. 라싸에 남은 티베트인들은 격렬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중국군에 의해 무참히 진압됐고, 이후 수많은 티베트인이 국경을 넘어 망명길에 올랐다.

달라이 라마의 망명은 단순한 도주가 아니라, 티베트의 정신과 문화를 보존하기 위한 '이동하는 정부'의 시작이었다. 히말라야를 넘은 그날의 발걸음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티베트 독립운동의 불씨가 됐으며, 비폭력 저항의 상징으로 역사에 남았다.

acene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