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볼리바르, 페루 대통령에 임명되다 [김정한의 역사&오늘]
1823년 9월 10일
- 김정한 기자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823년 9월 10일, 리마에서 열린 페루 의회는 시몬 볼리바르를 페루 공화국의 최고 지도자로 공식 임명했다. 이 결정은 당시 페루가 스페인 제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겪고 있던 극심한 혼란과 위기 속에서 내려진 조치였다.
당시 페루는 아직 스페인 왕당파 군대가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도 정치적 분열과 무능한 정부로 인해 독립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페루의 독립을 이끈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이 1822년 사임하고 난 후, 페루는 군사적, 정치적 리더십의 공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페루 의회는 볼리바르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볼리바르는 이미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의 독립을 이끌며 '리베르타도르(해방자)'라는 칭호를 얻은 남미 독립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군사적 천재성과 확고한 리더십은 페루 독립군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다. 볼리바르의 페루 도착은 페루 독립운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됐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 즉각적인 군사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지휘 아래 독립군은 1824년 8월 6일 후닌 전투에서 승리하며 스페인 왕당파에 치명타를 입혔다. 같은 해 12월 9일에는 아야쿠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페루의 완전한 독립을 확정지었다.
볼리바르는 더 나아가 남미 통일국가를 꿈꿨다. 하지만 반란과 권력투쟁 속에서 그의 구상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쇠퇴했다. 그는 1830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콜롬비아로 건너갔고, 8개월 후 47세에 사망했다.
그럼에도 볼리바르는 페루 역사와 남미 독립운동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기록돼 있다. 그의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남미의 많은 도시와 광장, 통화에 새겨져 있다. 특히 '볼리비아'는 그의 이름을 딴 국가 명칭이다.
acenes@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