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물치 콧구멍'된 원고를 아시나요?

고 권정생 선생의 구전동요집 '깐치야 깐치야'와 그의 삶 이야기

고 권정생 동화작가 ⓒ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구전동요를 채록해 놓은 원고 뭉치를 출판하겠다고 어떤 출판사에서 가져갔는데 '가물치 콧구멍'이 돼버렸어. 어느 출판산지, 누군지…."

동화작가 고 권정생(1937~2007) 선생은 병약한 몸에 소변주머니를 차고 자신이 살던 안동의 이웃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찾아다니며 한편 한편 소중히 모았던 구전동요 원고를 어느날 송두리채 잃어버렸다. 책을 내자며 한 출판사가 찾아와선 원고를 들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가물치 콧구멍'은 경상도 말로 '함흥차사', '종적을 감췄다'는 의미다. 생전에 권정생 선생은 이 말을 자주 하며 안타까워 했다. 최근까지 인터넷 검색에서도 가물치 콧구멍된 원고는 어디에서도 출간된 흔적이 없다. 무슨 이유에선지 원고를 가져간 사람이 사장시켜 버린 것이다.

실천문학사에서 출간된 '깐치야 깐치야' ⓒ News1

그 귀하고 안타까운 원고가 어렵게 복원돼 지난달 실천문학사에서 '깐치야 깐치야'로 출간됐다. 원고를 찾을 수도 없었고, 어딘가 메모해놓은 것도 없었지만 민들레교회 주보인 '민들레 이야기'에 29회(1989~1990년)에 걸쳐 연재한 54편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분량은 책 한권으로 묶어내기엔 모자랐지만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의 안상학 시인은 선생의 소설과 산문을 샅샅이 찾아 인용된 구전동요들을 모아 마침내 책을 냈다. 권정생이 사망한 지 7년만이다.

권정생 선생이 모은 구전동요에는 슬픔과 고통에도 해학을 한자락 깔아놓는 민초들의 꿋꿋함이 녹아 있다. 권 선생의 고단한 인생과 처절한 내용의 그의 동화에도 마찬가지다. 전쟁과 병,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여지없이 현실을 버티는 한 자락의 끈 같은 희망, 가물치 콧구멍 같은 희망이 아스라하게 들어있다.

예를 들어 '온달 같은 우리 엄마' 동요엔 어머니를 그리는 어린이의 심정이 "온달 같은 우리 엄마 반달 같은 나를 두고/저승길이 얼마나 멀어 한번 가니 못 오시나요"하며 서글프게 그려진다. '생아 생아 노래'에선 사촌언니네 집에 갔다가 밥 한 끼 얻어먹지 못하고 돌아온 소녀가 세상의 무정하고 야속함을 토로한다.

"생아 생아 사촌 생아/쌀 한 쪽만 재졌으면/너도 먹고 나도 먹고/구꾸정물 받았으면/소도 먹고 말도 먹고/(중략)생아 생아 사촌 생아/어찌 그리 무정튼고"하며 공생하지 못하고 자기 잇속만 챙기는 인심을 비판한다.

하지만 전쟁통의 어린이들에게도 즐거움은 있었다. "이거리 저거리 각거리/중쇠 맨데 또 맨데/저거리 밭골 파밭골/연지 토끼 열두냥/가사 머리 양두 칼침"('다리 세기' 전문)은 아이들 여럿이 마주보고 앉아 다리를 서로 엇갈리게 쭉 뻗어은 다음 다리를 차지게 치면서 즐겁게 부른 노래다.

또 '조선 사람 조선 말로'는 '여러분 미국 담배 사지 맙시다/조선 사람 조선말로 노래 부르고/조선 사람 조선 말로 이야기하네('조선사람 조선말로' 일부)라며 억압받기만 하던 민중이 갖고 있던 '결기'를 보여준다.

교회 사택 앞의 권정생.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권정생의 인생도 고통과 해학과 결기가 녹아있는 민중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1937년 9월 12일 일본 도쿄의 변두리인 시부야 혼마찌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에게 가난은 예약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조선인들과 일본의 하층민들이 모여 살았던 빈민가엔 막노동자, 거지, 술주정뱅이, 정신병자 등이 밤낮없이 비틀거렸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흉내를 내며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해댔다.

일본에 강제 노동징용으로 끌려오게 된 그의 아버지는 거리 청소부로 일하며 일곱 명의 자식들을 근근이 먹여살렸다. 권정생의 아버지는 쓰레기 더미에서 헌 책을 가려내어서 뒤란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이따금 찾아오는 고물장수에게 얼마의 돈을 받고 팔았다.

6~7세의 어린 권정생은 그 쓰레기 책 더미 속에서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찾아내어 읽곤 했다. 책을 통해 스스로 문자를 익히면서 곰팡내가 나고 반쪽이 찢겨져 나가고 불에 타다 담은 '이솝이야기', '그림동화집',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읽으며 권정생은 문학에서 위안을 찾았다.

권정생 가족은 미국의 도쿄 대공습(1945. 3. 10)이 있기 전에 소개(疏開)되어 한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1953년 봄, 경북 안동의 일직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권정생에겐 더 가혹한 날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은 그를 중학교 근처도 못 가게 했다.

돈을 모아 학교를 가겠다며 부산으로 가서 일을 하던 권정생은 3년만에 숨이 차서 자전거를 못탈 정도로 몸이 약해진다. 폐결핵과 늑막염까지 걸려 만신창이가 된 그를 어머니는 집으로 데려오지만 어머니가 아프면서 거꾸로 권정생은 어머니를 간병해야 하는 신세가 된다.

1970년대 결핵요양원에서의 권정생(서있는 사람 중 제일 오른쪽). 권정생의 결핵과 늑막염은 완치되지 못하고 평생을 따라다니며 그를 괴롭힌다. ⓒ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1965년 사랑하는 어머니는 결국 죽고 지친 심신에 정신적 충격까지 겹쳐 권정생은 방광과 한쪽 신장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다. 30세의 젊은 나이인데 평생 튜브로 소변을 뽑아내고 소변주머니를 늘 차고 다니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학업은 물론 제대로 된 직업도 잡지 못하게 된 그는 1967년 안동시 조탑동에 정착해 그 마을의 교회 종지기가 됐다.

하지만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 똥'을 발표하고 이 작품이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새 삶이 시작됐다. 이어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권정생은 1984년부터 교회 뒤편의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 즉 생애 첫 자신만의 아늑한 공간을 갖고는 즐거워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 살며 글을 쓰다 2007년 5월 17일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은 것이니 거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유지에 따라 2009년엔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이 설립됐다. 권정생 재단의 사무처장을 지낸 안상학 시인은 "연간 1억 5000만원의 인세가 나온다"면서 "이 돈을 남한과 북한의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을 돕는 데 쓰고 있다"고 말했다.

안 시인에 따르면 생전의 권 선생은 "약간 여성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 유머감각이 풍부"하면서도 "소신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생각과 행동이 같았"다.

권정생이 1984년부터 기거한 빌뱅이 언덕 밑의 작은 흙집. ⓒ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집은 비만 안맞으면 되고, 옷은 몸을 가릴 수 있으면 되며, 음식은 배가 안고프면 되는 것"이라면서 소박한 삶을 살았지만 그는 어린이가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고 꿈을 펼칠 수 있는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싸웠고 교회에 대해선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실천하기는커녕 부를 축적하고, 늘리고, 세습하는 정반대의 일을 하고 있다"고 매섭게 비난했다.

그리고 '강아지 똥'과 '몽실언니'가 모두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됐지만 "가난한 이를 돕는 길은 우리 스스로가 가난해지는 것"이라는 신념에 따라 빈자의 삶을 살다가 갔다. 사망 당시 거처엔 책 외에는 변변한 살림살이가 없었던 생이었다.

ungaunga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