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질 권리 법제화? 범죄·실언 등 과거세탁에 악용될 뿐"
[인터뷰]박경신 고려대 교수 "인터넷 본질 훼손하는 규제될것"
국내는 이미 법으로 '게시물중단' 가능해..."누구위한 규제인가"
- 김현아 기자
(서울=뉴스1) 김현아 기자 = "잊혀질 권리는 과거를 세탁해야할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거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담긴 인터넷 게시물에 대해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하는 '잊혀질 권리'를 두고 찬반 논쟁이 한창이다. '알권리'와 '잊혀질 권리'가 맞서고 있는 가운데 박경신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잊혀질 권리'가 법제화돼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다.
박 교수가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를 강력히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터넷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는데다 과거를 세탁하고 싶은 사람에게만 유리한 법이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박 교수는 지난달 유럽사법재판소(ECJ)가 내린 판결을 "인터넷의 핵심을 훼손하는 판결"로 평가했다.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쟁에 불을 댕긴 계기가 된 ECJ 판결은 스페인 변호사 코스테하 곤잘레스와 구글이 맞붙은 사건이다.
곤잘레스는 지난 1998년 일간지에 실린 자신에 대한 기사가 십수년이 지나서도 구글 검색결과에 등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문제의 기사는 연금부담금 미납으로 곤잘레스의 집이 강제경매에 넘어간 사실을 담고 있었다. 곤잘레스는 빚을 모두 해결한데다 오랜 시간이 흘러 해당 기사와 자신은 아무 관련이 없다며 신문사에는 기사 삭제를, 구글에는 검색결과에서 기사 링크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는 진정을 스페인 개인정보보호기구(AEPD)에 냈다.
AEPD는 신문사와 구글에 각기 다른 결정을 내렸다. 신문사가 게재한 공고는 스페인 노동복지부 명령에 기초한 합법적인 정보란 이유로 삭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반면 구글에 대해서는 검색결과가 정보주체의 정보보호나 인격에 대한 기본적 권리를 침해할 우려가 있는 경우 삭제를 명할 권한이 있다고 봤다.
이에 반발한 구글은 스페인 고등법원에 소송을 냈다. 스페인 법원은 이 사건이 유럽연합 개인정보지침에 대한 사항이라며 유럽사법재판소(ECJ)에 판결을 구했다. ECJ는 AEPD와 마찬가지로 곤잘레스가 구글 검색결과에 자신의 기사가 노출되지 않도록 신문기사 링크에 대한 삭제를 요청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박 교수는 "이 판결에서 원문 삭제를 하지 않은 것은 유럽에서도 '잊혀질 권리'가 형식적으로는 인정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고 밝혔다. 검색결과에서 문제의 기사 링크가 빠지긴 했지만 신문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해당 기사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단지 기사검색이 안되도록 '검색차단' 조치만 했던 것뿐이다.
박 교수에 따르면 인터넷은 미디어처럼 대중에게 정보를 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각종 방법을 동원해 필요한 정보를 찾는 공간이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탐색할 때 거쳐야 하는 첫 관문이자 필수코스가 바로 '검색'이다. 도처에 깔린 무수한 정보들을 내가 입력한 키워드에 맞춰 찾은 뒤 한 곳에 정리해 보여주는 검색 기능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터넷에 있는 정보들은 '있어도 없는' 게 된다. 따라서 구글 검색결과에서 특정 링크의 삭제를 인정한 ECJ 판결은 "인터넷의 핵심을 훼손한 판결"이란 게 박 교수의 의견이다.
우리나라는 굳이 '잊혀질 권리'를 법제화하지 않아도 명예훼손이나 저작권·초상권·사생활 침해에 해당된다고 판단되는 인터넷 게시물에 대해 차단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돼 있다는 게 박 교수의 얘기다.
네이버와 다음 등 국내 포털서비스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44조에 따라 명예훼손, 저작권·초상권·사생활 침해에 해당되는 게시물에 대해 30일간 보이지 않도록 처리하는 '게시 중단 요청 서비스'를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잊혀질 권리'를 법제화하는 것은 인터넷 이중규제일 뿐만 아니라 규제개혁을 추진하려는 정부의 기조에도 역행하는 것이다.
박 교수는 "우리나라는 이미 법으로 표현의 자유에 어느 정도 제한하고 있는데 '잊혀질 권리'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더 제한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결국 '잊혀질 권리'란 건 잊혀지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서 "그렇다면 과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는 경우 범죄 피해자들을 기억할 의무와 기억해야만 하는 절절한 이유들은 다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잊혀질 권리'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바로 '과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다. 또 선거를 앞두고 과거 실언, 문제될 만한 행동 등을 덮으려는 정치인들이 '잊혀질 권리'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 지난 6·4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 가운데 약 40%가 1건 이상의 전과를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잊혀질 권리'가 법으로 보장되면 과거 범죄 사실을 보도한 언론 기사들이 검색결과에서 삭제되거나 가려질 수 있고, 이는 각 후보들에 대한 정보가 왜곡, 은폐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박 교수는 "자신에 대한 정보를 계속해서 검색한 뒤 싫은 정보를 골라 삭제를 요청하는 아르바이트를 고용할 수 있는 사람들과 특히 과거에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과거 세탁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호재를 맞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 교수는 '잊혀질 권리'의 국내 도입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그럴 일은 없다"고 못박았다. 그는 "유럽에서도 인정하지 않은 원문 삭제로까지 나아간다면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한다"며 "합법적으로 올라온 정보를 검색결과에서 제외하겠다는 건 인터넷을 차별하는 조치로 헌법재판소의 판단 흐름에도 반한다"고 강조했다.
hyu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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