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장일치→집합동의'…벤처투자 표준계약 손질에 초기라운드 판 바뀌나

RCPS 옵션 빠지고 전환우선주 기본…IPO 결과의무 '최선노력'으로
고의·중과실 4가지 한정 리스크 완화…공정·신뢰 기반 투자환경 방점

벤처투자 표준계약서 및 해설서 인포그래픽 (중소벤처기업부 제공)

(서울=뉴스1) 김민석 기자 = 정부가 3년 만에 벤처투자 표준계약서를 개편하면서 상환전환우선주(RCPS)·연대보증·기업공개(IPO) 의무 등 핵심 분쟁 조항을 대대적으로 손질했다.

상환권(RCPS)이 옵션으로 빠지고 사전동의권은 '전원 개별 동의'에서 '라운드별 집합 동의'로 변경돼 스타트업의 초기 라운드(시드·시리즈A) 설계와 딜 구조 전반에 연쇄 변화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실상 '만장일치 거부권'서 '라운드별 집합 동의'로

8일 업계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한국벤처투자는 최근 '벤처투자 계약문화 발전포럼'을 열고 벤처투자 표준계약서와 해설서 2026년 개정안을 발표했다. 이번 개정은 2023년 이후 3년 만으로 투자계약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스타트업의 협상력 한계를 보완하고 공정·신뢰 기반 투자 환경을 조성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사전동의권이다. 그간 정관 변경, 유상증자, 인수합병(M&A) 때마다 투자자 전원 개별 동의를 받는 사실상 '만장일치 거부권 체제'가 유지돼 한 곳만 반대해도 딜이 지연되거나 무산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새 표준안은 의결권 주식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전원 동의로 간주하는 라운드별 집합적 동의 방식으로 전환했다.

동의 대상도 정관 변경, 대규모 증자, 합병·분할 등으로 좁혔다. 발행주식총수 10% 이내 스톡옵션 부여나 인수단가보다 높은 가격의 증자는 투자자와 협의만으로 가능하도록 해 초기 스타트업의 스톡옵션·후속 투자 운용에 숨통을 틔워줬다는 평가다.

업계에선 이같은 집합적 의사결정 구조가 시드·시리즈A 라운드 설계에 연쇄 변화를 부를 것으로 본다. 최근 인공지능(AI)·로보틱스·반도체 등 딥테크 후기 라운드와 대형 딜에 자금이 쏠리며 초기·비(非)딥테크 영역에선 '딜 가뭄'과 '창업 빙하기' 진단이 나오고 있다. 이 상황에서 라운드별 동의 구조는 딜 속도를 높이는 대신 포트폴리오 재편 압박을 키울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벤처 투자 표준계약서 및 해설서 2026년 개정판(중소벤처기업부 제공)
RCPS 대신 CPS 기본…리픽싱도 완화

상환·전환 구조에선 상환전환우선주(RCPS) 위주의 관행을 손보는 데 초점을 맞췄다. RCPS는 일정 조건에서 투자자가 투자금을 돌려받거나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는 권리가 결합된 우선주로 국내 벤처투자에서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다만 이익이 나지 않는 초기 스타트업에서는 상환권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어렵고 상환 시한이 다가온다는 심리적 압박만 키운다는 비판이 이어져 왔다.

이번 표준안은 CPS(전환우선주)를 기본 구조로 삼고 상환권을 옵션으로 제시해 상환을 '예외적 안전장치'로 되돌리는 방향을 제시했다.

기업가치 하락 시 전환가를 조정하는 리픽싱 조항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바뀌었다. 개정안은 기존 최저가(풀 래칫) 방식 대신 기존 주주와 투자자 간 균형을 고려한 가중평균·브로드 베이스 방식을 기본으로 제시해 다운라운드에서도 창업자·기존 주주의 지분 희석을 완화하도록 설계했다.

벤처투자 표준계약서 및 해설서 인포그래픽 (중소벤처기업부 제공)1
IPO '결과 의무'→'최선 노력 의무'로

IPO 조항은 '언제까지 상장해야 한다'는 결과 의무에서 벗어나 상장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의무로 바뀌었다. 상장 지연이 곧 계약 위반·풋 옵션 행사로 이어지던 부담이 줄어드는 대신 비상장 M&A·사업모델 피벗 등 대안적 엑시트 옵션을 검토할 여지가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상장 또는 M&A에 이르지 못하더라도 진술·보장 위반, 자금 용도 일탈 등 중대한 계약 위반이 발생하면 투자원금과 이자, 최근 주가·평가액을 반영한 높은 가격으로 주식매수청구권이 행사될 수 있어 회계·법률 리스크 관리와 준법 경영의 중요성이 커질 전망이다.

창업자 연대보증·제3자 연대책임의 제한도 리스크 재배분의 연장선상이다. 개정 표준계약서는 작년 말 벤처투자법 개정 내용을 반영해 가족 등 제3자에게 광범위한 연대책임을 부과하는 관행을 막고 △선행조건 미충족 투자 유도 △허위 진술·보장 △투자금 용도 일탈 △무단 지분 처분 등 고의·중과실이 있는 네 가지 사유에만 제한적으로 연대책임을 지도록 명시했다.

전화성 한국초기투자액셀러레이터협회 회장은 "이번 표준계약서와 해설서 개정은 투자자와 창업자가 모두 신뢰할 수 있는 공통의 계약 기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글로벌 투자 관행과 국내 투자 환경을 함께 반영한 만큼 앞으로 불필요한 협상 비용과 분쟁을 줄이고 보다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벤처투자 문화가 정착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ideaed@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