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트 칠해서 '중대재해' 막는다" 기업들 문의 쇄도
페인트업계에 협업 요청…사고 줄이는 'CUD'에 관심 집중
제일제당·현대중공업 등도 적극 도입…'산재 강경대응' 영향
- 장시온 기자
(서울=뉴스1) 장시온 기자 = 하루 4만 배럴의 원유를 처리하는 울산의 한 산업단지. 100여 개의 공장이 몰려 있는 이곳은 항상 화재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2개의 대피소가 설치돼 있지만, 막상 불이 나면 당황한 근로자들이 어디로 대피할지 알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피소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 글자가 작고 무채색인 데다 바닥에 칠해진 유도선도 주변과 색이 비슷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이에 공장은 유도선을 빨간색으로 바꾸고 너비도 키웠다. 표지판은 색약자도 식별할 수 있도록 흰색 배경을 파란색으로 바꾸고 직관적인 디자인으로 개선했다. 그 결과 현장 근로자 10명 중 9명 이상이 설문조사에서 "산업재해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답하는 등 산업재해 예방을 강화할 수 있었다.
정부가 '산업재해 강력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기업들이 페인트업계와 손을 잡고 사업장에 '컬러유니버설디자인'(CUD)을 적용하는 추세다. 건설사와 플랜트 등 민간기업뿐만 아니라 공공기관도 페인트업계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CUD는 외국인 근로자 등 누구나 직관적으로 산업현장의 위험 요소를 인식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색상 디자인으로, 대피 유도선이나 추락주의 표시, 지게차 주행로 등에 적용된다. 사고 발생률을 낮추고 사고가 나더라도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CUD 설계는 주로 페인트 기업이 맡는다. KCC(002380)가 대표적이다. KCC는 최근 식품기업 CJ제일제당(097950)과 MOU를 맺고 이 회사의 부산공장과 물류센터에 맞춤형 CUD를 적용하기로 했다. 위험 구역과 작업 동선을 명확히 구분하고, 사고 발생 시 근로자가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대피 유도선을 개선하기로 한 것이다.
양사는 이를 전국 CJ 사업장으로 확대한다는 목표다. CJ그룹 안전경영포럼에서 KCC가 '색과 안전, 도료를 통한 산업현장 안전 확보'를 주제로 별도 발표도 할 예정이다. 김태호 CJ제일제당 안전경영실장은 "근로자의 안전은 타협할 수 없는 최우선 가치"라며 "안전한 사업장을 만들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특히 건설·플랜트업계의 문의가 최근 몰리고 있다. KCC는 HD현대중공업(329180) 울산본사 및 선각공장에도 안전 컬러디자인을 적용하기 시작했고, 삼화페인트(000390)는 지난 7월부터 호반건설 건설현장에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과 함께 개발한 안전색채를 적용 중이다.
이헌형 한국컬러유니버설디자인협회장은 "CUD는 한국에 소개된 지 채 10년이 안 된 개념이지만, 산업안전 중요성이 강조되고 외국인 근로자가 늘면서 산업 현장에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고 했다.
이같은 추세는 새 정부의 '산업재해 강경대응'이 본격화하면서 대책 마련에 나선 기업들이 '현장부터 바꾸자'는 방침을 세웠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은 산업 현장에서 사망사고가 잇따르자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규정하고 형사처벌과 징벌적 손해배상, 영업정지 등 강력한 처벌을 주문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떨어짐, 부딪힘, 물체에 맞음 등이 가장 많았고, 외국인 사망자도 13%를 넘는다.
이에 건설사를 필두로 한 산업계가 현장 안전관리를 강화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돌입했고, 그 일환으로 CUD 적용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조직 개편 같은 거창한 조치보다 산업 최전선에 있는 현장 환경부터 바꾸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는 게 기업들의 생각"이라고 했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사업주는 위험한 장소나 시설, 비상시 대처 등에 관한 안전보건표지를 근로자가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설치해야 한다. 시행규칙을 통해 표지의 형태와 색채 기준까지 규정하고 있다.
페인트업계는 산업계 전반에서 안전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만큼 향후 여러 산업군과 협력해 '안전한 사업장 만들기'에 나서겠단 목표다. 맹희재 KCC 컬러디자인센터장은 "향후 다양한 기업이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협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zionwkd@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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