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 만에 황당한 봄"… 원료 수급·가격 폭등에 멈춰선 페인트거리 [르포]
"옥상 우레탄 공사 봄성수기…재료 없어 못 팔아"
"사재기 할 돈도 없어…내달 오르는 페인트값, 부담만 늘어"
- 신민경 기자
(서울=뉴스1) 신민경 기자
겨울 비수기 겨우 버티고 이제 옥상 방수철이라 한숨 돌리나 했는데 물건이 없어서 일을 못 해요. 25년 장사해 왔지만 이런 황당한 봄은 처음입니다.
지난 25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4가역 인근의 안료 상점가는 대낮임에도 인적이 드물어 적막감이 감돌았다. 평소라면 봄철 보수 공사를 앞두고 물건을 싣고 내리는 트럭들로 분주했을 거리지만, 지금은 텅 빈 선반을 허탈하게 바라보는 상인들의 한숨 소리만 가득했다. 중동 전쟁발(發) 원유 공급난으로 촉발된 석유제품 가격급등에 직격탄을 맞은 모습이었다.
매장 관리자 이 모 씨(64)는 "날이 풀리면서 옥상 우레탄 방수 공사 문의가 쏟아지고 있지만, 공급할 물량이 없어 손님을 그냥 돌려보내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우레탄과 유성 페인트 수급이다. 봄은 겨울철 얼어붙었던 외벽과 옥상을 보수하려는 수요가 집중되는 최대 성수기지만, 원룟값 폭등과 수급난이 겹치며 대리점의 창고는 바닥을 드러냈다.
페인트 가게를 운영한 지 4년 된 김 모 씨(52)는 "겨우내 봄만 기다렸는데, 막상 대목에 재료를 못 받으니 너무 속상하다"며 "옥상 발수 우레탄은 찾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재고는 이미 2주 전에 동이 났다"고 하소연했다.
40년 넘게 거리를 지킨 정인철 씨(72)도 "3월 초부터 사실상 놀고 있다. 물건이 없어 못 파니 매출이 반토막 났다"며 고개를 저었다.
상인들의 가장 큰 걱정은 '가격 저항'과 '자금난'이다. 1977년 안료상점을 개업해 거리를 지켜온 70대 최 모 씨는 "환율이 오르니 수입 안료나 금분·은분 같은 색소 파우더 가격이 감당 안 될 수준"이라며 "그나마 있는 재고도 떨어져 가는데, 불경기라 물건을 쟁여둘 돈도 없고 운영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당장 다음 달부터 공급가가 30~40% 이상 오르면 소비자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지만, 손님이 아예 끊길까 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최 씨는 "상황이 장기화한다면 점포 유지가 불가능하다"며 "수십 년 지켜온 가게를 접어야 할지 하루에도 몇 번씩 고민한다"고 덧붙였다.
현장의 비명에도 불구하고 페인트 업계는 원자재 가격 상승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 23일부터 줄줄이 가격 인상에 나섰다.
노루페인트(090350)는 국제 원자재 시장의 변동성을 이유로 시너류 제품 가격을 최대 55%까지 대폭 올렸다. 세부 품목별로 살펴보면 △DR-170L 55% △DR-421 40% △DR-170Q 25% △DR-960 20% 등의 인상률을 기록했다. 삼화페인트공업(000390)도 '신나' 제품군부터 우선 최소 40% 수준으로 가격을 인상했다.
제비스코는 내달 1일부터 품목별 가격을 15% 이상 올릴 예정이다. KCC(002380)도 아파트와 빌라 외벽 등에 쓰이는 건축용 도료를 비롯해 발전소용 플랜트 도료 등의 가격을 내달 6일부터 인상한다.
smk503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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