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진 칼럼] 은하계에서 가장 멍청한 판결?

김화진 법무법인 YK 고문. (뉴스1 DB)

김화진 법무법인 YK 고문 = 최근의 상법 개정으로 회사 경영자와 이사회의 법률적 책임이 무거워지면서 그에 대한 균형안으로 이른바 '경영판단의 원칙'을 상법에 도입할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 경영판단의 원칙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알려준 사건의 주인공은 미국의 월트 디즈니(Walt Disney)다. 디즈니는 주식의 저평가, 적대적 M&A 위협, 기업 지배구조의 낙후성 등으로 어려움을 겪은 회사다.

마이클 아이스너 전 회장은 1995년 마이클 오비츠를 신임 사장으로 영입한다. 아이스너와 25년 지기였던 오비츠는 할리우드 최대의 에이전시를 경영하면서 약 1400명의 일급 배우, 감독, 작가, 뮤지션을 관리했던 인물이다. 즉 영화와 음악에 관계된 미국 최대의 거물이었다. 회사가 그런 사람을 CEO로 영입하려면 어느 정도 대우를 해야 했을까.

연봉 2360만 달러에 퇴직보상금 1억 4000만 달러였다. 그런데 오비츠는 불과 1년 2개월 만에 해임됐고 사장직에서 물러나면서 계약에 따라 천문학적 퇴직금을 수령했다. 그 때문에 주주들이 아이스너와 이사들을 상대로 8년간 소송을 벌였다. 총 9360페이지의 증인신문 조서가 작성됐고 1033건의 서증이 제출됐으며 수천 페이지의 준비서면이 제출됐다. 판결문 자체도 180페이지다. 결과는 주주들 패소.

미국법상 회사 이사들이 ⑴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함이 없이 ⑵선의로(good faith) ⑶합리적인 수준의 정보에 입각해서 ⑷자신의 행동이 회사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믿으면서 ⑸적절한 절차를 거쳐 내린 사업상의 결정은 나중에 그 결과 때문에 '법률적' 책임의 발생 원인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도입하게 될 경영판단의 원칙이다. 이 원칙에 의하면 이사가 경영에 관해 내린 결정은 사안을 숙지하고 신중한 판단에 의해 내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사의 책임을 물으려는 주주들은 그 추정을 복멸할 만한 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델라웨어 주 법원은 디즈니 이사회가 오비츠에 대해 과도한 처우를 결정하는 실책을 범한 것은 인정했지만 법률적 책임을 발생시킬 정도는 아니었다고 판결했다. 여기서 법원은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와 법 원칙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간격이 있음을 지적했다. 베스트 프랙티스는 이상적인 기업 지배구조를 위한 희망 사항이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 법률은 아니므로 그 자체가 이사의 책임 여부를 따지는 기준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건 담당 챈들러(William Chandler) 판사는 판결문 곳곳에서 이 사건에 관련된 디즈니 경영진과 이사회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동 판사는 이 사건 피고들의 행동에서 주식회사의 이사들이 향후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사회의 독립성 부족, 오비츠 보수의 적정성을 검토한 외부 전문가 의견이 보상위원회 위원 전원에게 회람되지 않은 점, 이사들이 관련 자료를 25분 만에 읽고 오비츠에 대한 보수를 승인한 점 등이 지적됐다.

더구나 이사회 승인은 회사와 오비츠가 계약서에 서명하고 언론에 공표한 지 1개월 이상이 지난 시점에야 이뤄졌다. 법원은 아이스너가 이사회에 충분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은 점, 사전에 언론 공표를 함으로써 이사회가 오비츠의 고용 및 보수 조건에 대해 승인하도록 부담을 느끼게 한 점 등은 회장의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9일 열린 더불어민주당 코스피5000특위·경제형벌민사책임합리화TF와 경제 8단체 간담회에서 박일준 대한상의 상근부회장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오른쪽은 이동근 경총 상근부회장. /뉴스1 ⓒ News1 오대일 기자

그러나 법원은 아이스너가 법률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외부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고 개별 이사들 및 보수위원회 구성원과 오비츠 고용에 관해 의견을 나눈 점, 보수위원회가 오비츠의 보수 조건을 검토하고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받은 후에 오비츠의 고용계약을 승인한 점 등에 비춰 아이스너와 이사회의 의사결정에 있어 충분한 검토를 게을리한 중과실은 없다고 봤다.

법원은 디즈니 정관상 오비츠를 포함한 모든 임원의 해임권은 전적으로 아이스너에게 있으므로 이사회가 아이스너의 의사결정에 관여하거나 이의 제기를 하지 않은 것이 이사의 충실의무를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오비츠 해임 결정은 결정의 기초가 된 모든 정보를 숙지하고 전문가 자문을 구해 사적인 이해관계 없이 회사에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내려진 것이다.

그러나 챈들러 판사는 이 판결이 디즈니에서 일어난 일이 별문제 아니라는 취지로 해석되면 안 된다고 누차 강조한다. 디즈니 이사들에게는 과실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사들에게 법률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이사들의 중과실이 인정돼야 한다. 중과실이 없었고, 아무리 잘못된 믿음이었다 하더라도 아이스너가 회사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고 믿었던 한 이사들은 경영판단 원칙의 보호를 받는다. 요약하면, 판사는 이런 문제는 이사회나 주주들이 회사 차원에서 해결할 일이지 왜 법원으로 가져오느냐는 취지로 판결한 것이다.

이 사건 이후 한 법학 교수는'은하계에서 가장 멍청한 결정'도 법률적 책임을 피해 갈 수 있다는 취지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잊으면 안 될 것은, 법률적 책임 외에는 모든 책임을 다 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아이즈너는 결국 주주들의 압력으로 사퇴하게 된다.

경영판단의 원칙이 발생시키는 또 하나의 효과는 주주들이 회사의 지배구조와 사업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경영진과 직접 소통으로 해결하는 경향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소송과 회사법의 역할이 점차 감소하고 대화와 사적인 계약의 비중이 커져서 결국에는 판사와 법학 교수의 존재감이 작아질 것이다. 그런데 판사와 법학 교수가 심심해지면 그 사회는 좋은 사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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