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세 "12.3 비상계엄 다큐 영화 왜 만들었냐고? 부끄러움 때문에…" [N인터뷰]

이명세 감독/ 프로덕션 에므 제공
이명세 감독/ 프로덕션 에므 제공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충무로의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과 12.3 비상계엄 소재의 다큐멘터리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 것 같다. 하지만 이 감독은 영화를 연출하기로 마음먹었고, 이를 곧 관객들에 선보인다.

이명세 감독은 최근 진행된 영화 '란 12.3' 관련 뉴스1과 인터뷰에서 '뉴스공장' 스튜디오 건물 앞 CCTV 화면을 무심히 응시하는 계엄군의 이미지로부터 이 영화가 시작됐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타르코프스키의 말을 빌린다면 영화를 감독하는 것은 확실한 이미지 하나로 시작됩니다. 그 이미지를 예고편으로 만들어야겠다, 저 한 장면만으로 12월 3일을 설명할 수 있겠다는 각이 나왔죠. 그 장면이 만든 것은 공포였어요. 옛날의 기억을 끄집어 올리게 했죠."

이명세 감독이 언급한 "옛날의 기억"은 과거 군 권력에 의해 시민들의 자유가 억압되던 서슬 퍼런 시기와 연관이 있었다.

'란 12.3' 포스터
'란 12.3' 포스터

"유신 시대와 제5공화국 시대가 떠올랐어요. 그때를 떠올리면 늘 소환되는 시는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입니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하는 시 말이에요. 또 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의 첫 문장도 떠올랐죠. '나는 참으로 부끄러운 많은 삶을 살았다.' 이런 것들이 어느 시기가 되면 소환돼요. 부끄러움이라는 단어, 내 자신이 미워지는 어떤 것들이죠."

이명세 감독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거장이다. '개그맨'(1989)으로 데뷔해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첫사랑'(1993) '지독한 사랑'(1996)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형사 Duelist'(2000) 'M'(2007) 등 시대마다 한 획을 그은 명작을 만들어왔다. 특히 서사 보다 이미지와 리듬, 분위기를 중시하는 남다른 미장센은 이 감독만의 독특한 인장처럼 여겨지며 그에게 '충무로의 스타일리스트'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영화감독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고, 무기력감이 들 때가 있어요. 저는 과거에 공격을 많이 받았던 감독 중 하나죠. '시기가 어떤 시기인데 '개그맨'을 찍느냐'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희로애락을 그리는 것이 영화감독으로서 저의 목표였지만, 그러면서도 그때마다 떠올리게 되는 단어는 부끄러움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같은 것이었죠. 그 느낌이 이번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이명세 감독은 비상계엄이 선포됐던 2024년 12월 3일을 떠올리면 '트와일라이트 존'에 들어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이명세 감독/ 프로덕션 에므 제공

"그날 시사회를 끝내고 뒤풀이를 가려고 하는 차에서 들었어요. 오후 11시 정도 됐을 거예요. 늦게 끝났는데 트와일라이트 존이 시작된 것 같았죠. 여러분은 지금 다른 차원에 들어서 있습니다, 하는 느낌. 꿈과 현실의 경계, 그런 황당함 당황스러움의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영화 만들기를 결심한 이후 생각보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제작사가 결정되고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제작비를 모았다. 영화를 만들며 세웠던 기준 하나는 "개인적인 판단을 집어넣지 않는 것"이었다.

"제가 영화를 만들 때 늘 하는 거지만 저는 판결을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때의 어떤 생생한 현장을 한번 담아보자, 그것만이 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완성된 영화는 이명세 감독의 독특한 색깔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인터뷰와 내레이션 없이 '보여주기'에만 집중하는 다큐멘터리는 극 영화처럼 박진감이 넘치며, 독자적인 리듬으로 사건을 맞닥뜨려야 했던 이들의 감정과 서사를 풀어낸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 감독이 "케데헌"이라 자랑스럽게 지칭한 'C·D·E·H'이다.시네마틱(Cinematic)에서 드라마틱(Dramatic) 이모셔널(Emotional) 유머(Humor)까지. 네 가지의 요소를 살리는 방향으로 영화를 연출하고 편집했다. 실제로 영화는 진지하고 급박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종종 유머러스한 순간들을 드러내 웃음을 준다.

"과거에 제가 촬영을 하다 버스에 한 번 깔린 적이 있었어요. 그때 차에 막 끌려가면서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면 주마등처럼 모든 게 지나가는데 왜 나는 안 지나가는 거지?' 했었어요.(웃음) 이런 상황과 (비상계엄 상황에서 맞닥뜨린 아이러니한 순간들이) 비슷한 거예요. 보좌관들이 국회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데 거기 보면 '계단을 오르면 건강해집니다'하고 적혀 있어요. 그런 엄혹한 순간에도 그런 게 보이면 찰나에 '이게 뭐야, 내가 건강해지는 거야?'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죠. 웃음이 나올 수도 있고."

이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해서 앞서 말한 '부끄러움'이 해소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걸 가지고 풀어냈다고 하면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저의 부끄러움은 시대적인 것도 있고, 개인적인 것도 많아요. 요즘은 찾아내서 다 사과하고 있어요, 영화를 보고 젊었을 때 막 씹었던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다녀요. 부끄러운 일들이 많습니다. 어느 장소에 가면 '아 그때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생각이 나는 것처럼 저를 부끄럽게 하는 장면들이 나와요. 부끄러움에 대한 것은 영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편 '란 12.3'은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기습적인 비상계엄 선포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나선 이들의 숨 막히는 현장 기록을 담은 이명세 감독의 시네마틱 다큐멘터리다. 150여 명의 시민이 제공한 영상과 사진, 국회 관계자 및 취재진의 기록 등 방대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오는 22일 개봉한다.

eujenej@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