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 12.3'…충무로 스타일리스트 이명세가 만든 '계엄 다큐' [시네마 프리뷰]

22일 개봉 영화 '란 12.3' 리뷰

'란 12.3' 포스터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충무로의 스타일리스트'라 불리는 이명세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12.3 비상계엄을 소재로 한 '란 12.3'은 MBC 특별기획 '타임 - M'(2011) 이후 그가 약 16년 만에 선보이는 다큐멘터리다. 영화 측에 따르면 제목에 들어간 '란'(亂)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착안한 것으로, 지금 우리가 마주한 현실 역시 또 다른 의미의 '난중'일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영화는 웅장한 클래식 음악으로 시작한다. 막이 걷히면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윤 전 대통령이 말할 때마다 마이크에서는 하울링이 나고, 이처럼 블랙 코미디적인 편집이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톤 앤드 매너를 대변한다.

영화는 '그날 밤'을 실감 나게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둔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언하고, 국회의원들과 시민들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든다. 그와 동시에 출동한 경찰과 군인이 이들과 실랑이를 벌인다. 본회의장에 먼저 도착한 의원들은 아직 오지 않은 이들에게 전화를 돌린다. 경찰에 가로막힌 국회의원들은 보좌관과 시민들의 도움으로 담을 넘는다.

이 모든 장면은 국회 보좌관과 시민 등 183명이 제보한 동영상을 편집해 완성했는데, 의외로 박진감 넘친다. 계엄령 해제를 위한 정족수 150명을 채워야 하는 상황. 동료 국회의원들을 기다리는 이들과 군대의 진입에 대비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는 보좌관들의 모습, 창문을 깨고 국회에 진입하기 군인들의 모습이 차례로 편집돼 극 영화 못지않은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기록으로 남지 않은 장면들은 자막이나 그래픽 노블 스타일 만화로 처리됐다. 윤석열 전 대통령부터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 등 비상계엄 수사 과정에서 거론된 바 있는 익숙한 이름들이 나눈 대화가 자막으로 등장한다. 조금은 노골적이지만 사람에 따라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색깔을 구분해 표시했다. 비상계엄 전후 서울시의 일상적인 풍경과 시민들의 모습은 만화로 표현됐다. 이는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의 비현실적인 느낌을 강조한다. 감성을 건드리는 편집도 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의 영상이 중간 중간 삽입돼 두 사건의 유사성이 강조된다.

'란 12.3'의 특이한 점은 내레이션과 인터뷰를 모두 배제했다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무성 영화의 형식을 차용해 음악과 자막만으로 내용을 끌어간다. 직접적인 목소리 없이 '보여주기'만을 한 것은 다큐멘터리의 본질에 더 가닿기 위한 노력으로 읽힌다. 새로운 시도도 있다. 기존 정치인들의 모습을 AI로 재현한 장면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AI로 제작한 이 영상은 오른쪽 아래에 'AI 재현 영상'임을 표시해 실제 영상과 구분했다. 다만, 웃음을 주려는 목적 외에 이런 장면들이 영화 안에서 갖는 의미와 효용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란 12.3'은 의외의 작품이다. 한국 영화 르네상스 초창기, 자신만의 미장센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이명세 감독과 사실성이 중요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일견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명세 감독은 창작의 영역이 그리 넓지 않은 이런 장르에서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뚝심 있게 유지했다. 직접적인 목소리를 없애고 시각적 다채로움을 추구하며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냈다. 더불어 그와 30년 가까이 함께해온 조성우 음악 감독의 음악은 영화만의 색채를 더욱 또렷하게 만든다. 조 감독은 극 중 '피아노맨'으로 출연까지 했다. 상영 시간 96분. 오는 22일 개봉한다.

eujenej@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