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부터 '세계의주인'·'넘버원'까지…장혜진의 세상 모든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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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넘버원' 스틸 컷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배우 장혜진(50)을 대중적인 배우로 올라서게 만든 작품은 영화 '기생충'(2019)이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에 빛나는 봉준호 감독의 이 역작에서 그는 주인공 기택(송강호 분)의 아내이자 남매 기우(최우식 분) 기정(박소담 분)의 엄마인 충숙을 연기했다. 전직 국가대표 해머던지기 선수 출신인 충숙은 영화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관객들의 입장 볼 때 가장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주인공 중 하나였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속 인물이 대부분 그렇듯 충숙은 기존 영화 속 스테레오타입 엄마들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였다. 그는 가족 중 가장 강력한 완력을 자랑했고, 가족들이 벌이는 사기극 안에서 도덕적인 갈등 없이, 임기응변으로 뚝딱뚝딱 문제를 해결하며 제 몫을 해냈다. 충숙의 이런 캐릭터는 당시 관객들에게는 낯설었던 배우 장혜진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통해 현실감을 얻었고, '연기 차력쇼'였던 '기생충' 앙상블의 수준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기생충'보다 앞서 장혜진이 돋보였던 작품은 '우리들'(2016)이었다. 어린이들이 주인공이었던 '우리들'에서 장혜진은 주인공 선(최수인 분)의 엄마를 연기했는데, 단역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력으로 주목받았다. 실제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 속 장혜진의 모습을 보고 그를 '기생충'에 캐스팅한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 '기생충' 스틸 컷

1975년생인 장혜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1기 출신으로 1998년 영화 '크리스마스에 눈이 내리면'으로 데뷔했으나, 이후 활동을 이어가지는 않았다. 데뷔 이후 관객들에 각인될 때까지 무려 20년여년이 걸린 셈인데, 그 사이 배우를 포기하고 결혼을 해 주부로 살아온 시간이 있다. 아이를 키우며 생활인으로 살아가던 장혜진을 다시 카메라 앞에 세운 것은 이창동 감독이었다. 영화 '박하사탕'(2000)의 오디션을 본 적이 있던 장혜진은 남편의 지지 속에 당시 이 감독이 준비하고 있던 신작 '밀양'(2007) 오디션에 응시했고,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그렇게 '밀양'으로 배우 활동을 재개했지만, 약 10년간은 단역을 전전했고 끝내 '기생충'을 만났다.

'기생충' 이후 장혜진은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친근한 배우로 사랑받아 왔다. 특히 '우리들'과 '기생충'으로 각인된 탓에 엄마 역할을 많이 했다. 그러나 얼핏 비슷할 수 있는 엄마 배역을 맡으면서도, '장혜진의 엄마는 다르다'는 호평을 받아왔다.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는 요란스런 취향을 가진 북한의 고위층 엄마로, '그린마더스클럽'에서는 정치적 올바름에 집착하는 '자칭' 깨어있는 엄마 김영미, '정년이'에서는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딸을 인정하지 않는 유명 소프라노 엄마 한기주를 연기하며 극에 재미를 더했다. 또 '은중과 상연'에서는 홀로 딸 은중을 홀로 씩씩하게 키우며 살아온 엄마를,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가정 폭력을 서슴지 않는 부상길(최대훈 분)의 옆에서 조용히 살아온 아내 박영란 역할로 몰입을 끌었다.

영화 '셰계의 주인' 스틸 컷

가장 최근 주목을 받았던 장혜진의 엄마는 영화 '세계의 주인'(2025) 속 강태선이다. '우리들'로 함께 했던 윤가은 감독과 재회한 이번 영화에서 장혜진이 표현한 강태선은 씩씩한 딸과 친구처럼 지내는 엄마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이가 품고 있는 상처에 함께 아파하고, 옆에서 이를 든든하게 지지해 주는 인물이었다. 강태선은 복합적인 인물이었는데, 가족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홀로 회피 중인 남편 때문에 남모르게 고통받고, 아이들 눈을 피해 술을 마시며 괴로움을 달래는 모습이 이를 암시했다. 장혜진은 보편적이면서도 개별적인 강태선의 캐릭터를 특유의 자연스러운 연기로 훌륭하게 표현했다. 때때로 강태선이 짓는 텅 빈 듯한 표정은 인물의 고통을 드러내며 영화에 묘한 긴장감을 부여했다.

지난해 '세계의 주인'에 이어 장혜진은 새해에 또 한 번의 엄마 역할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예정이다. 그가 11일 개봉을 앞둔 신작 영화 '넘버원'에서 연기한 은실은 남편과 큰아들을 먼저 보내고 유일하게 남은 아들 하민(최우식 분)에게 음식 해주는 재미로 사는 소박한 인물이다. 은실은 지난한 삶을 이어왔음에도 당찬 부산 사투리와 유쾌한 태도로 삶에 깃든 그림자를 쳐내며 영화의 따뜻한 톤을 완성한다. '기생충'에서 모자(母子)로 호흡한 최우식이 또 한 번 아들 역할로 그와 만났는데 전작에서와 전혀 다른 모자 관계가 눈길을 끈다.

장혜진은 최근 진행된 '넘버원' 관련 인터뷰에서 "내 나이 여배우들이 엄마 역할을 피할 때 나는 과감하게 도전해서 앞으로 10년 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포지션을 해놓고, 하나둘씩 아닌 것도 하려고 한다"면서 엄마 역할에 대한 자부심을 표했다. 또한 "엄마가 다 다르다, 내 블루오션이다, 앞으로 엄마는 무궁무진하다"며 "엄마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느낌이 아니라 변주가 조금씩 돼가면 끊임없이 할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거 없다고 하지 않나, 변주하면 재밌다"고 말하기도 했다.

eujenej@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