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쇼크 반영 전인데 휘발유 1800원…정부 '유류세·비축유' 카드 고심

정부 "상황 주시 중…사태 장기화 여부 판단해 대응" 가능성 열어둬
러-우 전쟁 땐 유류세 인하율 37%까지 확대…비축유 1165만 배럴 방출

미국과 이란 전쟁 여파로 국제 유가가 상승하고 있는 4일 서울 서초구 경부고속도록 만남의광장 주유소에서 시민들이 주유를 하고 있다. 2026.3.4 ⓒ 뉴스1 김도우 기자

(세종=뉴스1) 이정현 이강 기자 =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 충돌 여파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반영되기도 전부터 기름값이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4일 기준 서울 지역 휘발유 평균 판매가격은 리터(ℓ)당 1800원을 돌파했고, 경유 가격도 하루 새 70원 넘게 급등했다.

통상 국제유가가 국내 주유소 가격에 반영되기까지 2~3주의 시차가 발생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최근 상승 속도는 이례적으로 빠르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부는 중동 사태 장기화에 대비해 유가 안정을 위한 유류세 추가 인하와 비축유 방출 등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상승 흐름이 이어질 경우 대응 시점이 앞당겨질 가능성도 있다.

5일 정부 관계자는 유류세 추가 인하 또는 인하 조치 연장 가능성에 대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다만 "사태가 장기화할지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정부는 전쟁 장기화 가능성과 국제유가 흐름, 비축 여력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 대응 수위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이다.

유류세 추가 인하 폭 '관심'…러-우 전쟁 땐 법상 최대한도 37%까지

유류세 인하가 결정될 경우 관건은 '인하 폭'이다. 지난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당시 전임 정부는 같은 해 5~6월까지 30%로 유지했던 유류세 인하율을 하반기에는 법상 최대한도인 37%까지 확대했다.

당시에도 전쟁이 국제유가 급등을 자극했다. 유류세 조정은 시행령 개정 사안으로, 정부 결정과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면 추가 인하가 가능하다.

현재도 유류세 인하 조치는 시행 중이다. 정부는 이달 1일부터 내달 30일까지 수송용 유류에 대해 휘발유 7%, 경유와 액화석유가스(LPG) 부탄은 10%의 인하율을 적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휘발유는 L당 57원, 경유는 58원, LPG 부탄은 20원의 가격 인하 효과가 발생한다. 다만 해당 조치는 중동 사태 이전, 국제유가가 비교적 안정적이던 시점에 결정된 것으로 최근의 급등 흐름을 제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국제유가는 연일 상승세다.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면서 중동 지역 에너지 수송 차질 우려가 커진 영향이다. 지난 3일(현지시간) ICE선물거래소에서 브렌트유 선물 종가는 배럴당 81.4달러로 전장 대비 3.66달러(4.71%) 상승했다.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역시 3.33달러(4.67%) 오른 배럴당 74.56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국제유가는 3거래일 연속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다.

김민석 국무총리가 3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중동 상황점검 관련 긴급 관계부처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2026.3.3 ⓒ 뉴스1 임세영 기자
비축유 방출 시점·규모는…러-우 전쟁 땐 개전 후 거의 '즉시'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공사 설립 이후 현재까지 총 5차례 비축유 방출이 이뤄졌다. 1991년 걸프전, 2005년 미국 허리케인 카트리나 사태, 2011년 리비아 사태, 2022년 글로벌 고유가 대응 협력,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이다.

가장 최근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다. 정부는 개전 직후인 같은 해 3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총 1165만 배럴의 비축유를 방출했다. 역대 방출 가운데 규모가 가장 컸다. 당시 국제유가는 한때 배럴당 128달러까지 치솟는 등 급등세를 보였고, 이에 대응하기 위한 선제 조치 성격이 강했다.

이번에도 전쟁이라는 점, 특히 한국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중동 지역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와 유사한 수준의 대응이 이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다만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는 분석도 있다. 이번 사태의 경우 브렌트유 가격이 아직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하지는 않았다. 1979년 이란 혁명이나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당시 국제유가가 각각 160%, 180% 급등했던 것과 비교하면 상승 폭은 제한적이라는 평가다. 이에 따라 정부가 비축유 방출 시점과 규모를 신중하게 조절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부는 일단 사태 장기화에 대비해 비축 여력을 점검하며 추가 물량 확보에 나선 상태다. 현재 국내 9개 석유 비축기지에 저장된 비축유는 약 1억 배럴로, 국제에너지기구(IEA) 권고 기준인 90일분을 웃도는 117일 사용량에 해당한다. 정유사 등 민간 비축 물량까지 포함하면 약 208일분을 확보하고 있다. 추가로 저장 가능한 물량은 약 5000만 배럴로, 약 59일 사용이 가능한 규모다.

한편 국제유가 상승분이 아직 본격 반영되지 않은 상황에서 서울 휘발유 가격이 1800원을 넘어서자 청와대도 시장 점검에 나섰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원유 계약은 대부분 선적 시점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며칠 사이에 가격이 즉각 반영되기는 어렵다"며 "국내 석유제품 가격 동향을 면밀히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서비스인 오피넷에 따르면 전날 오전 기준 서울 휘발유 평균 가격은 L당 1820.53원으로 전날(1788.47원)보다 32.02원 올랐다. 전국 평균 가격도 1751.44원으로 전날보다 28.4원 상승했다.

경유의 서울 평균 가격도 1766.02원으로 전날(1707.43원)보다 무려 58.59원 뛰었다. 전국 평균 가격은 1680.12원으로 전날보다 45.50원 상승했다.

서울 휘발유 평균 가격이 1800원을 넘어선 것은 지난해 12월 3일(1805원) 이후 91일만, 서울 경유 평균 가격이 1760원을 넘은 것은 2023년 10월 이후 29개월 만이다.

euni1219@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