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인하했지만…반도체·의약품은 여전히 '회색지대'
'최혜국 대우' 원칙만 확인…세율·적용 시점은 미국 재량에
전문가 "FTA 체결국에 15% 관세 이례적…美 추가 요구 가능성도"
- 나혜윤 기자, 전민 기자
(세종=뉴스1) 나혜윤 전민 기자 = 한국이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서 상호관세와 자동체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성과를 거뒀으나, 핵심 품목의 관세 유예와 후속 이행 조건, 추가 압박 가능성까지 고려하면 남은 과제가 여전히 적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반도체와 의약품 등 주요 수출 품목의 경우 '조건부 관세 유예' 상태에 놓여 있으며, 미국이 일본과의 협상 조건으로 꺼낸 '분기별 이행 점검' 조항도 한국에 유사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와 함께 방위비 분담금 협상 등 안보 이슈도 미해결 상태여서, 미국의 관세 압박 카드가 지속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31일 브리핑에서 "미국이 한국에 8월 1일부터 부과하기로 했던 상호관세 25%는 15%로 낮아진다"면서 "추후 부과가 예고된 반도체·의약품 관세도 다른 나라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상호관세 부과 시행을 하루 앞두고 한미가 극적으로 협상 타결에 성공했지만, 반도체·의약품과 같은 품목에 대해선 '최혜국 대우'라는 표현 외에 구체적인 세율이나 적용 조건이 명확히 제시되지 않아 관세 부과의 불확실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실제로 반도체와 의약품은 아직 구체적인 관세율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은 지난 27일(현지시간) 무역확장법 제232조에 근거한 반도체 관세 조치를 향후 2주 이내에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러트닉 장관은 유럽연합(EU)과의 합의 발표 현장에서 "우리는 반도체 생산을 미국으로 다시 가져올 것"이라며 자국 반도체 산업 재건 의지를 강하게 피력했다.
러트닉 장관이 언급한 무역확장법 제232조는 특정 품목의 수입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대통령이 관세 등 수입 제한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미 상무부는 반도체뿐 아니라 의약품과 구리 등 전략 품목에 대한 조사를 진행 중이며, 러트닉 장관은 7월 말까지 관련 조사를 완료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미국과의 협상 타결로 상호관세와 자동차 관세는 15%로 낮아졌지만, 반도체와 의약품 등의 품목관세는 아직 정해지지 않아 미국 정부의 재량에 따라 일방적으로 세율이 결정될 수 있는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업계는 지금까지 무관세였던 반도체·의약품 품목에 향후 15% 수준의 관세가 부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EU와 일본도 미국과의 협상에서 동일한 세율에 합의했다는 점과 한국 역시 이들처럼 '최혜국 대우' 원칙을 적용받는 만큼 비슷한 수준의 관세가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비용이다. 로이터통신 등은 의약품에 15%의 관세가 부과될 경우, 글로벌 제약·바이오 산업에 130억~190억 달러(약 18조~26조 원)의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그 중 일부는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될 수밖에 없다. 한국산 의약품에 고세율이 적용되면 바이오시밀러 중심의 국내 수출 전략은 구조적 제약에 직면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국내 제약·바이오기업들도 선제 대응에 나선 상태다. 셀트리온은 최근 미국 내 의약품 생산시설 인수 입찰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고, SK바이오팜은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 위탁생산처를 확보해 관세 부담을 줄이려 하고 있다.
이번 관세 협상의 파급력은 경제적인 수치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반도체·의약품뿐 아니라 방위비 분담, 기술규제, 안보 협력 등 다른 영역과도 연동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농산물 수입 확대와 분기별 이행 점검을 조건으로 관세를 낮췄다. 한미 협상 역시 '지속적 이행 점검'을 조건으로 한 장기 협상 구조가 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오늘 합의는 양측이 충분한 협의 과정을 거쳐 이룬 것이기에 합의로 보는 것이 맞다"면서도, '2주 뒤 한미 정상회담 전까지 미국이 추가 요구를 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는"3개월, 6개월 후 글로벌 통상 환경이나 미국 정치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여 본부장의 해당 답변이 '관세 15%로 끝난 협상'이 아니라, 조건부 이행과 사후 협상을 내포한 진행형 구조라는 점에서 향후 상황을 주목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정세은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는 "의약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것은 각국의 건보 정책 등 공공의료 체계에 영향을 주는 조치로, FTA(자유무역협정)를 체결한 동맹국 간 신뢰를 훼손하는 일"이라며 "이제는 각국이 개별 대응할 것이 아니라, 불공정한 글로벌 통상구조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송영관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상황에서 FTA를 체결한 국가로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는 회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이번 협상 결과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단기적인 소나기는 피했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가 될 수도 있다"며 "방위비 협상이 아직 남아 있고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종료 이후에도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한미 FTA라는 기존의 방어막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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