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이경규의 나이테론…29년 장인의 끼니걱정

배구 국제심판 김건태씨 © News1 조재현 기자

(서울=뉴스1) 배성민 기자 = # 그때 채널을 돌렸다면 방송사고로 오해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공중파(KBS) 방송의 드라마도 아닌 뉴스 프로에서 8초간의 정적이었다. 그리고 ‘네’라는 질문자의 한마디가 있었고 출연자의 가벼운 떨림이 있었다. 그리고 내뱉은 말 “다음달부터는 저도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 했다. 12월31일 오전 0시가 좀 지난 때 이같은 회한의 말을 한 이는 배구심판으로 코트의 포청천으로 불렸던 국제심판 김건태씨(위 사진)였다.

배구 국가대표였던 김 심판은 난치병 때문에 선수 생활을 일찍 접고 심판의 길로 들어섰다. 변변한 월급은 물론 연금이나 퇴직금도 없었지만 코트에 대한 그리움으로, 배구에 대한 헌신으로 심판의 길에 정진했고 이내 국내는 물론 국제무대에서도 최고의 심판으로 꼽혔다. 85년부터 심판의 길로 들어선 그는 지난 1987년 국내 A급 심판이 된 이래 1990년 국제심판, 1998년 국제배구연맹(FIVB) 국제심판으로 20여 년 동안 활약했다. A매치 350여 경기를 비롯하여 그랑프리, 월드리그, 세계선수권대회, 올림픽 등 주요 국제대회 결승전 주심을 12회나 맡았다.

그런 그가 지난해 12월29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휘슬을 내려놓게 된 것이다. 58세 정년을 채우면서다. 명심판이었지만 기껏해야 오심이나 해프닝 등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져야 방송을 타던 그가 30년에 가까운 헌신으로 키(190㎝)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코트의 거인 소리를 들으며 뉴스의 한꼭지를 장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7분여의 방송은 30년의 생활을 돌아보는데 턱없이 모자랐다. 보람도 털어놓았지만 아쉬움과 미안함도 묻어났다. 끼니 걱정은 스스로와 배구계를 향한 채찍질이기도 했지만 가족들에게 꺼내놓은 미안함이기도 했다. 삶을 정리하는 코트의 거인에게 배구계와 체육계가 허락한 것은 꼭 그만큼 뿐일까도 싶었다.

개그맨 이경규(=SBS 연예대상 캡쳐) © News1

# 비슷한 시각 개그맨 이경규(위 사진)도 또다른 울림을 줬다. 2013년 연말 SBS 연예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그는 대상의 꿈에 멀어지자 "모든 게 물거품으로 돌아갔다"고 농담을 던지며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대상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33년간 개그맨으로, 예능인으로 달려온 비결에 대한 소개였다. 말을 맺으며 그는 “오늘 나오면서 이어령 교수님의 좋은 글귀를 읽었다. 열대 우림에 있는 나무는 나이테가 없는데 우리나라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견뎌서 나이테가 있다”고 했다. 그날 아침 한 조간신문에서 이어령 교수가 팔순을 맞은 인터뷰를 통해 밝힌 말이었다. 이경규가 말을 맺자 사회를 보던 신동엽도 자기도 그 신문을 봤다고 추임새를 넣었다.

80년대 초 개그맨이 된 이경규는 몇 년간의 무명생활을 거쳐 몰래카메라, 양심냉장고, 이경규가 간다 등의 코너로 스타가 됐다. 더운 여름이었다.

하지만 슬럼프도 있었다. 평균 이상의 시청률을 냈지만 ‘그래도 이경규인데’ 라며 주변에서는 슬럼프라 했고 실제 슬럼프가 됐다. 그가 씨름판에서 코미디언의 길로 인도했다는 강호동을 비롯해 후배들도 치고 올라왔다. 추운 겨울이었다. 몇 년간의 부진 속에 변함없는 방송감과 끊임없는 자기실험으로 남자의 자격, 힐링캠프 등을 통해 다시 재기했다. 나이테가 쌓여간 것이다.

데뷔한 지 33년이 된 그는 “내년에 나이테가 더 생기는데 한살의 나이테라 생각하고, 신인 자세로 돌아가겠다"고 덧붙였다. 2014년에도 후배들과 겨뤄 대상에 또 도전하겠다고도 했다.

# 연말과 연초는 금융권을 비롯해 기업 등 각계 모두의 인사철이다. 새로운 인물들이 언론을 장식하지만 꼭 그만큼의 사람들이 무대 뒤켠으로 사라진다. 누구에게는 회한이고 누군가에는 희망과 도전이다. 뒤켠으로 물러난 이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도 있고 끼니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다. 모든 이에게는 하나씩 나이테가 더 생긴다. 개그맨 이경규의 말(혹은 이어령 교수의 인터뷰)처럼 더위와 추위가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1월1일이다. 새로운 나이테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시작의 날이다.

baes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