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확장]국가보안법과 재일동포 2-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편집자주 ...[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 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2022년 10월 25일~28일, 시민단체가 주최한 재일동포 초청행사 '동행'에 참가하기 위해 공항에서 만난 이철, 강종헌 선생들과 한통련 활동가들. 단체들은 평범한 회원들과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의전팀'을 꾸려 3박4일 내내 선생들과 동행했다. (사진제공 몽당연필)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 아래 글에는 지난 10월 25일부터 28일까지 민족문제연구소, 몽당연필, 포럼 진실과 정의, KIN지구촌동포연대 등 시민단체가 주최한 재일동포 초청행사 '동행'의 장면들이 설명없이 묘사되는 곳이 있습니다. 유튜브 동영상(https://youtu.be/vOyij_bIZgc) 를 보신 후 글을 읽으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이철, 강종헌, 이동석 선생님에게

저도 편지를 쓰긴 했습니다. 3박 4일간의 '동행'을 통해 저 또한 다른 회원들 처럼 많은 감회가 밀려왔는데 막상 써 놓고 보니 참 부끄러웠습니다. 마지막날 강화도 어느 식당에서 한사람 한사람 편지를 낭독하며 석별의 정을 나누었죠. 선생님들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와 누우니 전하지 못한 편지가 가방에 있었습니다. 반쯤은 안심했고 반쯤은 뭔가 찜찜했습니다. 그 찜찜함을 해소하고 싶었는지 오늘 다시 편지를 쓰게 되었네요.

저는 상상을 못하겠습니다. 90년대 까지 '사형수'는 감옥에서 하루 24시간 동안 수갑을 찬 채 생활했다고 하네요. 강종헌 선생님은 1976년 7월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무기수로 감형조치된 1982년 3월3일까지 무려 5년 9개월을, 이철 선생님은 1976년 5월25일 사형 언도 후 1979년 8월15일 무기로 감형될 때까지 3년 3개월을 수갑을 찬 채 하루 하루를 살아야 했습니다. 문장으로 써 내려가면 어찌어찌 쓸 수야 있겠지만 이게 정말 실제로 가능한 일인가요?

글로는 얼마든지 쓸 수 있으나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재일동포 양심수' 들에게는 당연한 듯이 일어났습니다. 이철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만 나열해도 소름이 돋을 지경입니다. 사랑하는 약혼녀와 함께 구속된 그날 부친께서 충격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부고를 감옥에서는 전혀 듣지 못하다가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그날에야 법정으로 들어가는 선생님을 만난 작은 아버지가 전해 주셨다지요. 1980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부고는 감옥에서 면회를 다녀온 동료 양심수를 통해 알았다고 들었습니다.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도대체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영문을 몰랐던 20대 초반의 재일동포 젊은이들, 그들 대부분은 검사의 공소장을 첫 재판이 열리는 대기실에서 처음 열람했다고 합니다. 대체로 30일에서 40일간 말로 형언할 수 없은 고문과 협박을 통해 조사관이 원하는대로 진술하고 손도장을 찍은 사람들입니다. 강종헌 선생님의 1심 선고 때 최후진술은 2~3분 만에 끝났다고 합니다.

자신은 결코 간첩이 아니다 모국의 젊은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박한 심정에서 유학을 결심했다며 예의 조용하지만 강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데 재판관이라는 사람이 "알았어" "이제 됐어"하며 가로막았다고 합니다.

재일동포 양심수는 자신의 조국에서 철저히 고립되었습니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서승, 서준식 형제를 실명으로 등장시킨 스파이 드라마가 방송될 정도였습니다. 형언할 수 없는 고문에 시달리다 난로불에 자신의 몸을 불사른 서승의 얼굴은 첫 재판 때 신문에 실렸지만 그 얼굴이 화상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작게 실렸습니다.

대대적으로 언론이 보도한 1975년 11월22일의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도 있었지만 체포도 재판도 형의 확정도 보도 조차 되지 않은 재일동포 간첩사건이 수두룩합니다. 이철, 강종헌 선생님의 경우도 우리나라 언론은 보도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형이라는 중형을 받았는데도요.

서준식 선생이 징역 7년의 만기인 1978년 5월27일, 석방을 애타게 기다리던 전주 교도소 앞의 가족들은 그를 끝내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른바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안감호처분을 받아 대전교도소로 이감된 후였습니다. 다시 10년을 더 감옥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서준식 선생을 기다리던 전주 교도소 앞에는 미국인 기자도 있고 일본인 기자도 있었지만 한국 언론 관계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국가보안법은 정상적인 인간의 두뇌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사연들을 잘도 만들어냈습니다. 김효순 작가의 <조국이 버린 사람들>에 따르면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일본과 연관된 간첩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약 150여 명이라고 합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1961년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건에서 시작되었고 70~80년대에 극을 달했다고 합니다. 정권에 위기가 오면 어김없이 재일동포 간첩사건이 터졌다고 하네요.

사진 3. ‘동행’에 참가한 사람들은 강화도의 가을 풍경을 즐기며 하루를 여유롭게 보냈다. 전등사 가는 길에 뭔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는 이철(왼쪽), 권해효(가운데), 이동석(오른쪽) (사진제공 몽당연필)

정보기관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2세 유학생이 우리말을 잘하면 총련 쪽 사람들과 접촉이 많았다는 방증이라고 받아들였다네요. 일단 간첩 용의자로 본다는 겁니다. 그뿐인가요? 재외국민교육원이라는 일종의 국책 어학원이 있었습니다.

어떤 재일동포 유학생은 일본에서 전혀 우리말을 모르다 조국을 알기 위해 재외국민교육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 누구보다 빨리 등급이 올랐습니다. 보안사, 중정의 수사관들은 그를 체포하고 고문할 때 "이렇게 빨리 우리말이 느는 이유는 네가 분명히 북한에 갔다 왔거나 조총련과 접촉했기 때문"이라며 간첩 자백을 강요했습니다.

7~80년대 군부독재정권이 국내에 들어온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조작 간첩사건을 무수히 양산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리 문화와 말을 잘 모르고 가족들도 멀리 떨어져 있으며 무엇보다 형을 살고 나서 일본으로 돌려 보내면 그뿐이라는 생각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이 그나마 겁냈던 것은 이러한 인권침해가 대한민국 땅 밖에서 세상에 알려지는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고문 조작을 발설하면 국내의 친족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 폭로했던 고순자, 권말자 선생들을 비롯해 서승, 서준식 형제의 불굴의 정신, 고문 조작의 피해자였지만 협박으로 인해 프락치가 될 수밖에 없었던 몇 명 동포 유학생의 용감한 양심선언이야말로 그 첫번째 두려움의 대상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빼 놓을 수 없는 존재들, 무라오카 히로토 기자, 언론가 마쓰이 야요이,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 요시마쓰 시게루 목사, 다무라 고지 등 이름을 열거하기에도 벅찬 수많은 '구원회' 소속 일본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승, 서준식 형제 사건을 시작으로 아직 재심 조차 시도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양심수들을 위해 현재까지도 싸우고 있습니다. 동포 유학생의 구속 소식을 들을 때마다 '구원회'를 조직하여 일본 정계와 시민, 언론에 호소하고 유엔이나 엠네스티를 찾아 그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무려 일본 전국에 40개가 넘는 지역 구원회가 있고 재일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전국회의라는 전국 조직까지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길고 질긴 투쟁으로 세상 사람들은 다 알았지만 정부와 군부, 언론의 은폐로 오직 조국의 국민들만이 진실을 모르고 살았던 것입니다. 일본 구원회 맴버들은 지금도 재일동포 양심수들의 재판이 있으면 일본에서 한걸음에 달려와 재판석을 가득 채웁니다. 대부분이 평범한 일본의 시민들입니다. 주로 구속된 학생의 동창생이거나 선후배, 지역의 인권활동가들입니다. 구원회 맴버들은 한국에 들어와 양심수들을 면회하고 옥바라지를 한 후에는 한국의 사회운동가, 진보적 지식인을 만나 연대를 호소했습니다. 대부분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재일동포 양심수는 북한의 간첩으로 알려져 있어 운동권 조차 피하고 보는 세상이었습니다. 고립감은 비단 양심수들의 소유물만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철저한 고립 속에 체포와 고문 조작, 재판과 징역을 살았던 분들 중에는 많은 분들이 일본으로 돌아가 다시는 대한민국의 '대'자와도 상종하기 싫다며 종적을 감춘 분들이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에 만들어진 한국대사관, 총영사관의 정보부 소속 공작원들은 일본 공안경찰과 손잡고 풀려난 동포를 계속 감시했으며 동포사회를 이간질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재일동포들 중에는 고문 조작으로 자신의 청춘을 날려버린 그 조국을 증오하지 않고 아직도 사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재일동포 양심수 동우회'를 조직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양심수들을 후원하고 민주화와 통일운동을 계속해 오신 이철 선생님, 지금도 일본의 어느 대학이나 시민강좌에서 열 띠게 동아시아의 평화와 한반도의 통일 문제를 강의하고 계실 강종헌 선생님, 한국 외국어대 프랑스어과에 재학하던 시절 연극반에서 처음 배역을 받아 들뜬 마음으로 공연을 준비하다가 끌려가 느닷없이 간첩이 되신 이동석 선생님. 2013년에 재심으로 무죄가 확정된 선생님은 늦깍이 대학생활을 만끽하고 계십니다. 이따금 어떤 행사에서 마주치면 그렇게 반갑지요.

전등사에서의 다짐. 환하게 웃는 동행 맴버들. (사진제공 몽당연필)

어째서인가요? 어째서 선생님들은 아직도 이 못난 조국을 그리워하고 타국에서 조국이 잘되길 그렇게 바라시나요? 조국을 배우고자 바다를 건넌 꿈 많던 재일동포 청년이 상상불가의 스파이 누명을 쓰고 모진 고문과 짐승 취급을 받으며 가족과 청춘이 파탄났는데, 어째서 선생님들은 이토록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을 하셨나요?

3박 4일의 마지막 날, 가을이 깊어가는 강화도 산사, 임진강이 눈 앞에 펼쳐진 정자에서 선생님들과 천천히 걸으며 단풍 구경을 했습니다. 일정 중에 단 하루였지만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생각합니다. 이전의 조국방문에서 그러했을 듯한 2박 3일이었지요. 선생님들은 여기서 했던 말을 저기서도 해야했고 하루에도 몇번을 같은 주장을 해야 했습니다.

보통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삶을 고통스럽게 드러내고 같은 입장의 양심수 친구들을 위해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은 호소와 주장과 토론으로 선생님들의 조국 방문 시간은 가득찼을 터입니다. 한번쯤은 그런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었나 봅니다. 함께 싸웠던 민변의 변호사들, 활동가들이 동행했습니다.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사람들과 함께 편안하게 선생님들의 노고를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3박 4일, 자는 시간만 빼고 선생님들과 함께 동행했던 어느 청년이 강종헌 선생님에게 보낸 편지글에 이런 말이 있었지요. 뚜렷이 기억하시겠지요. 긴 다짐 대신 그 친구의 편지글로 마무리를 대신할까 합니다.

"저는 제가 선생님들의 지난 아픈 시간들을 위로해드리고 좋은 시간을 꼭 만들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반대였어요. 가늠할 수 없는 선생님들의 깊은 품에 안겨 제가 위로를 받았고 앞으로를 더 살아나갈 힘을 얻었습니다. 어제 뒤풀이에서 앞에 앉아 계신 강종헌 선생님께서 저의 생일을 축하해 주시며 나이를 물으셨습니다. 저는 스물다섯살이라고 답하면서 참 혼란스러운 나이인 것 같아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그렇죠 참 혼란스러운 나이죠. 저는 그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았네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은 마음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먹을 꽉 쥐고 그저 선생님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선생님들이 지나온 모진 세월을 제가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중략) ~이 상처가 아물지 않게 계속해서 선생님들을 기억할 수 있는 감각으로 간직하고 또 간직하겠습니다. 기억하고 또 기억하겠습니다."

선생님들 또 뵙겠습니다. 겨울입니다. 몸 따듯이 하시고 건강하세요.

김명준 조선 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