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트럼프, 中 APEC 뒤 평양회담 제안해도 놀랍지 않아"

1기 트럼프 행정부서 대북외교 지휘 "北, 중간선거 지켜볼 것"
"보여주기식 회담 안 돼"…핵동결·지속외교, 韓 중심 역할 강조

스티브 비건 전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2018.12 19 ⓒ 뉴스1 신웅수 기자

(서울=뉴스1) 한상희 김예슬 기자 = 도널드 트럼프 1기 미국 행정부에서 북미 실무협상을 이끌었던 스티븐 비건 전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트럼프 대통령이 오는 11월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이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에게 '평양 회담'을 제안할 가능성을 거론했다.

18일 미 북한전문매체 NK뉴스에 따르면 비건 전 대표는 전날 인천에서 NK뉴스를 운영하는 코리아리스크그룹 주최로 열린 '웨스트 코스트 익스체인지'(West Coast Exchange) 콘퍼런스 기조연설에서 북미대화 재개 가능성과 조건을 제시했다.

비건 전 대표는 "북미 대화가 성사될 가능성을 그리 높게 보지 않는다"며 "우리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지도자들의 결정을 예측하려 하고 있다. 요컨대 우리는 추측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잇따른 대화 신호를 북한이 명시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비건 전 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두 차례 김 총비서와 소통하고 있다는 취지로 발언한 데 대해 "그 주장이 사실임을 뒷받침할 서한이나 막후 채널, 직접 소통의 증거는 분명히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다만 "북한과 관여할 때는 종종 무엇이 말해지지 않았는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한국 대통령이 김 총비서와 소통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했다면 김여정의 거친 비난이 곧바로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 총비서의 친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총무부장의 담화를 "과도하게 해석해선 안 된다"면서도 "두 정상이 소통하고 있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을 확인해 준 것도, 조만간 만나기로 합의했다는 의미도 아니지만 제안을 거부하거나 비난한 것도 분명히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관여할 뜻이 있다는 신호를 공개적으로 보내고 있고, 김 위원장은 그러한 관여의 문을 닫지 않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비건 전 대표는 "북한이 오는 11월 3일 미국 중간선거(상·하원 선거) 결과도 지켜볼 것이라며 "선거 결과가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를 가늠하고, 북한이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을지 판단하는 북한의 계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라고 예상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18~19일 중국 선전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 이후 김 총비서에게 회담을 제안하는 방안을 생각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비건 전 대표는 "그런 회담이라면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에서 만나자고 제안해도 전혀 놀랍지 않을 것"이라며 "북한이 관심을 보일 것인가. 중국이 회담 중재에 나설 것인가.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관여 자체를 위한 관여만으로는 한반도의 안보와 안정을 강화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며 "더 중요한 문제는 무엇을 위한 관여인가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협상 환경 2018년과 달라…한국이 중심적 역할 해야"

비건 전 대표는 현재의 협상 환경이 2018∼2019년과는 크게 달라졌다고 진단했다.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갑작스럽게 끝난 미완의 외교와 최근 5년간 이어진 핵·재래식 전력 증강, 미중·미러관계 악화, 북한의 우크라이나전 참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한반도의 평화적 관여에 만만치 않은 장애물을 만들었다"라고 분석했다.

비건 전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떤 합의가 이뤄지든 무엇보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한국 국민의 안보와 복지가 걸려 있다"며 "누구도 그 결과에 한국보다 더 큰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으며, 향후 외교에서 한국은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협상 목표에 대해서는 당장 완전한 비핵화만을 요구하기보다 북한의 핵능력 증강을 늦추거나 동결하는 현실적 접근을 제안했다.

그는 "명확한 우선순위를 설정하고 가급적 동북아 동맹국들과 조율한다면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 재개를 활용해 북한의 핵 증강을 늦추거나 동결하고 남북관계를 해빙시킴으로써 한반도의 안보와 안정을 증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보여주기식 정상회담만으로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양측이 수용할 수 있고 건설적인 진전의 토대가 될 인센티브와 상호 양보의 조합을 찾기 위한 조용하고 지속적인 외교에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비건 전 대표는 다수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단기 합의에 비핵화를 처음부터 포함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도 "향후 상황 전개에 따라 비핵화를 궁극적인 최종 목표로 남겨둬야 한다"며 "오늘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내일은 가능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는 비핵화 포기를 주장한 것이라기보다 핵 증강 감속·동결을 단기 목표로 삼고 비핵화를 장기적인 최종 목표로 유지하자는 단계적 접근이다. 트럼프 1기 당시 북한과 비핵화 및 상응 조치를 직접 협상했던 비건 전 대표가 이러한 현실론에 공개적으로 무게를 실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비건 전 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밝혔다"며 "이제 김 총비서에게 달렸다"라고 말했다.

비건 전 대표는 2018년 8월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로 발탁돼 하노이 북미정상회담과 판문점 회동 등 트럼프 1기 대북외교의 실무를 이끌었다. 같은 해 10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진행된 북미 실무협상에서는 미국 대표단을 지휘했고, 이후 국무부 부장관을 지냈다.

angela0204@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