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한일관계, 이젠 한국이 대승적 마음 가져야"

'트럼프 리스크' 난제 해법은…"자존심보단 현실, 열린 마음으로 대응해야"
"中 전승절 참석하면 불필요한 오해…한러관계 아직 회복 단계 아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4일 서울 종로구 보다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재단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7.14/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서울=뉴스1) 노민호 기자

"한일관계는 이제 한국이 대승적 마음으로 끌고 가야 한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한일 간 '감정의 골'을 계속 파 내려가지 않기 위해 한국의 '대승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일관계 강화를 추진하는 이재명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의 조언이다.

뉴스1은 지난 14일 반 전 총장과 만났다. 한국 외교의 미래를 위해 원로로서 조언하고 싶다는 반 전 총장의 눈빛은,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날카로웠다. 인터뷰는 서울 종로구의 '보다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재단'(이하 반기문재단)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통상부 장관(현 외교부 장관)을 지낸 반 전 총장은 한일관계에 있어 과거사 문제가 얼마나 민감한지 누구보다 잘 아는 원로 외교관이다. 그는 "한일 간의 문제는 (광복 기준) 80년이 됐다. 일제강점기 36년을 합치면 110여년이 된 문제"라며 "사사건건 과거사 문제를 엮으면 (논쟁에) 끝이 없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생각이 철저하게 '한국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고 여러 번 강조한 반 전 총장은 "과거사 문제는 당연히 일본 측 책임이 크다"면서도 "그러나 지금 와서 일본의 책임이 크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 한일관계 전체를 말하려 하면, 우리에게도 손해"라고 지적했다.

반 전 총장은 지난 5월 25일 국제 원로 자문그룹 '디 엘더스'(The elders) 회원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해 이시바 총리를 만나 한일관계와 북한 문제 등을 논의한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활동 내용을 상세하게 공개하지 않는 디 엘더스의 일본 방문 사실이 언론에 알려진 건 처음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4일 서울 종로구 보다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재단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25.7.14/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트럼프 리스크' 난제지만…"자존심보단 현실, 한국도 열린 마음 필요"

반 전 총장은 상호관세와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재협상, 국방비 인상 등 이른바 '트럼프 리스크'에 대한 해법으로는 '현실 외교'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스타일은 이제까지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라며 "좀 더 열린 마음으로 서로 대화하고,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최선의 범위를 받아 내는 게 좋다"라고 말했다.

특히 "공무원들은 대체로 '아껴야 충신'이 된다고 생각한다"며 "현재 우리가 돈이 없는 게 아니다. 적정한 선에서 우리가 타협하는 게 어떤가 싶다"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제안한 투자 요구 등을 적극 수용하는 방안으로 타협점을 찾는 것이 반 전 총장의 '현실 외교' 전략으로 보였다.

반 전 총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제기한 각종 사안이 '난제'임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게 행운이었다"라고 뼈 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반 전 총장은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도 미국으로부터 '확실한 보장'을 받아야 한다며 "이제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4년도 안 남았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타협점을 잘 찾는 게 좋다"라며 한국이 '현실'의 이익을 잘 찾는 것이 국익이라고 강조했다.

이재명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 뉴스1 DB
"中 전승절 참석하면 불필요한 오해 살 수도"…한러관계는 "회복 단계 아직 아냐"

반 전 총장은 중국이 오는 9월 3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리는 '항일전쟁 및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80주년'(전승절)에 이 대통령의 방문 의사를 타진한 것과 관련해선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가능성이 크다"라며 불참해야 한다는 데 무게를 실었다.

미중관계가 미묘한 상황인 데다가, 외교적 상호주의에 따라 한중 정상회담을 위해 시진핑 주석이 한국을 방문할 순서라는 점에서다. 미국을 향한 무력시위 차원으로 진행될 열병식이 열리는 전승절 행사에 참석할 경우 자칫 '친중' 이미지가 부각돼 외교적으로도, 국민들에게도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반 전 총장의 생각이다.

반 전 총장은 지난 2015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전승절 70주년 행사에 참석해 주빈들이 오르는 천안문 망루에 올랐을 당시, 유엔 사무총장 자격으로 함께했다. 반 전 총장은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을 움직여본다는 박 대통령의 구상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했음을 잘 기억하고 있는 인사다.

한러관계와 관련해선 "우리가 주도적으로 한러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쓸 단계는 아니다"라고 짚었다. 아직 북러 밀착이 공고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 전 총장은 이어 "한국이 우크라이나를 도와주면 한러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걱정할 것도 없다. 도와줄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게 정의고, 그래야 우리가 서방하고 얘기할 때 떳떳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14일 서울 종로구 보다나은 미래를 위한 반기문재단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뒤로 각국에서 받은 훈장과 감사패가 보인다.2025.7.14/뉴스1 ⓒ News1 민경석 기자
"조현, 정무와 통상 겸비…많은 이들의 이야기 들어야"

반 전 총장은 후배 외교관인 조현 외교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조 후보자가 왜 이재명 대통령한테 선택을 받았을까 생각을 해봤는데, 결론은 내 판단과 비슷했을 것 같다"라며 "조 후보자는 완벽하게 정무와 통상 2가지를 겸비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반 전 총장은 조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 외교부 장관에 정식 임명되면 "모든 걸 정도(正道)에 근거해 소신껏 하되 다른 사람의 얘기를 많이 들을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반 전 총장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엔 사무총장(제8대)을 지내며, 특히 '기후변화 대응' 어젠다를 전 세계에 각인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2015년 체결된 '파리 기후변화협정'은 반 전 총장 리더십의 산물로 여겨진다.

그는 기후 변화뿐만 아니라 빈곤, 교육, 성평등, 에너지 등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채택에서도 큰 역할을 했으며 이란핵합의(JCPOA) 등 주요 국제 이슈 해결에도 기여한 글로벌 외교 지도자이기도 하다.

유엔 사무총장 퇴임 후에도 반기문재단 이사장으로서 세계의 기후 변화 대응 등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활발히 활동 중이다. 반 전 총장을 제외한 전직 유엔 사무총장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각국에서 반 전 총장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4~5월에는 한 달 동안 8~9개국을 방문했다"라며 "좋은 일이 있다면 내 몸을 사리지 않는다"라고 미소를 띠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1944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외무고시 3회로 외교부에 입부해 주오스트리아 대사, 외무부 제1차관보,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외교통상부 차관, 장관 등을 역임했다.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제8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퇴임 후에는 글로벌녹색성장연구소(GGGI) 의장, 반기문재단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ntiger@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