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끝없는 전선'을 넘어, 한국형 ARPA-H가 증명할 것들
이승규 K-헬스미래추진단 PM센터장
1944년 11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착수되어 이듬해 7월 백악관에 제출된 바네바 부시(Vannevar Bush)의 보고서 '과학: 끝없는 전선'은 이후 80여년간 국가 과학기술 정책의 헌법이었다. 기초과학에 대한 정부의 무조건적 지원, 연구자의 절대적 자율성, 그리고 순수 연구가 응용을 거쳐 번영과 안보로 흘러간다는 '선형 모델'. 이 설계도 위에서 미 국립과학재단(NSF)과 국립보건원(NIH)이 세워졌고, 연구중심대학은 세계 지식 생태계의 기득권으로 자리 잡았다.
81년이 지난 2026년 7월 21일,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의 마이클 크라시오스(Michael Kratsios) 실장이 내놓은 '과학: 새로운 황금기'는 그 헌정 질서에 대한 개혁 선언이다. 부시의 유산이 둔중한 관료주의와 합의 중심의 보수적 평가, 소수 대형 기관의 자금 독점으로 변질되었다는 진단이다. 백악관은 선형 파이프라인의 폐기를 선언하고 AI 중심의 가속, 벤처형 포트폴리오, 개인과 신흥 조직에 대한 직접 투자를 축으로 국가혁신시스템(NIS)을 재구조화하겠다고 밝혔다. 예산관리국(OMB)의 FY2028 R&D 예산 지침과 연동돼 90일 내 이행계획 제출을 강제하는 실행력도 갖췄다.
두 보고서를 나란히 놓으면 방향이 선명해진다. 부시가 과학을 정치와 안보로부터 격리해 '자율성이 보장된 정원'으로 울타리를 쳐주었다면, 크라시오스는 과학기술을 국가 생존과 산업 패권을 이끄는 '실시간 엔진'으로 통합시키려 한다.
주목할 대목은 개별 제도의 손질이 아니라 R&D를 받치는 네 층위를 동시에 교체한다는 점이다.
지원 대상. 명문 대학의 간판과 거대한 간접비가 연구비 수주의 보증수표이던 시대를 끝낸다. 자금은 대학을 거치지 않고 개인 연구자와 2~3인 규모의 신흥 조직(X-Labs)에 직접 투사되며, 현장 기술자와 독립 연구자까지 대상에 포함된다.
평가 방식. 기존 동료평가는 평가자 간의 안전한 합의를 좇다가 판을 바꿀 아이디어를 '무모하다'는 이유로 걸러냈다. 새 정책은 단 한 명의 심사위원이 지지하면 즉시 자금을 집행하는 챔피언제를 도입하고, 연방 기관 스스로를 벤처캐피털과 같은 리스크 관리자로 재정의한다.
수행 인프라. 연방 슈퍼컴퓨터와 공공·민간 데이터, 도메인 특화 과학 AI를 결집한 'Genesis Mission'이 선봉에 선다. 연구자가 소형 연구실에서 코드를 보내면 국가 클라우드에 연결된 24시간 자율실험실의 로봇이 신소재를 합성해 결과를 돌려준다.
연구 행정. 행정 조직 없는 개인이 어떻게 연방 예산을 정산하고 규제를 준수하느냐는 질문에, 백악관은 기술에 의한 행정의 흡수로 답한다. AI 기반 행정 자동화 도구와 정부가 지정한 비영리 인큐베이터(Fiscal Agent)가 계약과 정산, 규제 검토를 대행한다.
이 네 층위는 서로를 지탱한다. 개인 직접 지원은 플랫폼형 행정 없이는 성립하지 않고, 챔피언제는 자율실험 인프라가 받쳐줘야 속도가 난다. 어느 하나만 떼어 이식해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이것이 이번 보고서가 한국에 던지는 첫 번째 경고다.
미국의 선언은 우리에게 두 개의 질문을 동시에 던진다. 이 속도를 어떻게 따라잡을 것인가, 그리고 따라가는 동안 무엇을 잃지 않을 것인가.
먼저 속도의 문제다. '추격형'에서 '퍼스트 무버'로의 전환을 모색 중인 한국에 이 변화는 서늘한 시사점을 남긴다. 한국도 K-문샷과 한국형 ARPA-H 등을 통해 임무지향 R&D와 PM(프로그램 매니저) 중심 제도를 도입해 왔다. 그러나 미국 정책의 진짜 메시지는 “ARPA형 조직 몇 개로 만족하지 말고 국가 R&D 전체의 선정·평가·집행 시스템을 리셋하라”는 것이다. 점진적 개선만으로는 관료적 합의주의와 나눠 먹기식 배분을 깨지 못한다. 인프라도 마찬가지다. 출연연과 대학 연구실이 수작업 위주의 가설-실험 관행에 머무는 한, AI 파운데이션 모델과 자동화 설비를 갖춘 연구실과의 생산성 격차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벌어진다.
다음은 잃지 않아야 할 것의 문제다. 화려한 선언 뒤에는 과학사의 오래된 경고가 드리워져 있다. 페니실린과 X선, 유전자 가위(CRISPR), 레이저처럼 인류의 삶을 바꾼 도약은 정책 담당자가 설정한 목적 지향적 KPI에서 나온 적이 거의 없다.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던 호기심이 낳은 뜻밖의 산물이었다. AI와 자율실험실은 축적된 데이터와 이론의 범주 안에서 최적화를 수행하는 데 비할 데 없이 뛰어나지만, 패러다임 자체를 의심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지는 못한다.
탐색 범위가 '성공 가능성이 높은 국가 목적 기술'로 좁아지면 30~50년 뒤 문명을 떠받칠 원천 지식의 샘이 마르고, 그때는 실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장기적 퇴보를 피하기 어렵다. 새 보고서는 연구자를 학계의 관료주의에서 해방하겠다고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기술 패권'이라는 더 거대한 실용주의의 틀을 씌우고 있다는 혐의를 완전히 벗지는 못한다.
그래서 속도와 효율성 모델을 비판 없이 전면 수용해서는 안 된다. 국가 R&D 포트폴리오의 일정 비율, 예컨대 20~30%는 목적도 상용화 평가도 효율성 기준도 적용하지 않는 '순수 호기심 기반 탐구 영역'으로 제도적 성역화가 필요하다. 미국이 놓칠 위험이 있는 것을 우리까지 함께 놓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국가 R&D 전체를 한꺼번에 갈아엎는 일은 불가능하고 위험하다. 필요한 것은 새 체제가 실제로 작동하는지를 검증할 살아 있는 시험대다.
소위 ARPA형이라고 불리는 도전적인 임무지향 R&D가 한국의 현장에 새롭게 자리 잡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더 필요하다. 미국의 방향성을 따라가더라도 그 방향으로 달릴 시스템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챔피언제가 우리 감사 제도와 양립하는지, PM에 어디까지 권한을 줄 수 있는지, 한국의 조건에 맞는 혁신은 어떤 형태여야 하는지는 기획 문서가 아니라 축적된 사례로만 답할 수 있다.
한국형 ARPA-H가 특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3년째에 접어들며 29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안, 난제 해결을 위한 변혁적 연구개발의 구체적 사례가 이미 쌓이고 있다.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새로운 혁신체계를 가장 먼저 실증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앞선 실험의 결과가 뒤따르는 사업의 설계로 흘러가는 경로를 제도적으로 열어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업을 '보건의료 난제를 푸는 또 하나의 사업단'으로만 운영한다면 기회의 낭비다. 앞서 언급한 네 층위는 함께 움직여야 하고, 그것을 한 지붕 아래에서 동시에 실험할 조직이 필요하다. 한국형 ARPA-H는 국가혁신시스템 전환의 시범 사업(pilot)이자 제도 실험의 전초기지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검증할 항목은 분명하다. 한 명의 챔피언이 지지하면 자금이 나가는 심사가 실제로 성과를 내는지, PM에 기획부터 중단까지 전권을 주었을 때 어디까지 감당 가능한지, 대학을 거치지 않고 개인과 소형 팀에 직접 자금을 투사하는 경로가 회계·감사 제도와 양립하는지, AI 자율실험과 행정 대행이 연구자의 부담을 얼마나 덜어주는지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어야 한다. 실패의 제도화다. 고위험 포트폴리오는 정의상 상당수가 실패한다. 그런데 지금의 평가 관행은 한국형 ARPA-H를 한 부처의 개별 사업으로 놓고 그 성패를 묻는다. 이 틀에서는 실패한 과제가 곧 사업의 흠결로 기록되고, 사업단은 실패를 감추거나 애초에 안전한 과제를 고르는 쪽으로 움직인다. ARPA형 혁신이 도입되자마자 무력화되는 경로가 바로 여기다.
시선을 바꿔야 한다. 한국형 ARPA-H는 특정 부처가 추진 중인 사업이 아니라, 정부 연구개발 전체가 공유하는 실험적 자산이다. 개별 과제의 성패가 아니라 무엇을 도전했고 무엇이 검증되었는가로 평가받아야 하며, 실패한 과제의 PM과 연구자가 다음 기회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원칙이 명문화되어야 한다. 29개로 시작해 최종 50여 개에 이를 프로젝트가 남길 가장 값진 자산은 성공 사례만이 아니라, 어떤 실패가 왜 일어났고 무엇을 학습했는지의 기록이다. 이는 사업단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산 및 제도 당국이 이 사업을 '한 부처의 사업'이 아니라 '국가 R&D의 제도 실험'으로 활용해야 한다. 실패를 용인하는 혁신은 사업단의 각오가 아니라 정부의 회계와 평가 규정 안에 자리를 얻어야 살아남는다.
핵심은 이 실험을 고립시키지 않는 것이다. 검증 결과를 지속해서 분석해 범부처 사업에 이식하고, 작동하지 않는 ARPA형 요소는 과감히 덜어내면서 한국의 환경에 맞는 진정한 '한국형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 시범 사업의 가치는 예산 규모가 아니라 국가 R&D 전체로 확산할 수 있는 제도적 자산을 얼마나 남기느냐에 있다. 그러자면 성과지표에 '제도 전환 실적'을 포함하고, 임무지향 포트폴리오의 한 귀퉁이에 목적을 묻지 않는 탐색 트랙을 함께 두는 설계가 처음부터 필요하다.
1945년 부시가 쏘아 올린 '끝없는 전선'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황금기는 실험의 속도나 기술 독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속도전 한가운데서도 뜻밖의 질문과 우연한 발견의 기쁨을 지켜내는 나라만이 21세기 황금기의 주인이 될 것이다. 한국형 ARPA-H가 그 두 가지를 함께 증명해 낸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업이 아니라 한국 과학기술 체제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점이 될 것이다.
eggod6112@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