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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의사 없다, 딴 병원으로"…국가유공자 유족 수술 거절한 보훈병원

보훈병원 진료 차질 첫 사례…나이 요건 안 맞아 위탁 지원도 안돼
6개 보훈병원에 전공의 9명 남아…"긴급 지원제도 활용해야"

(서울=뉴스1) 박혜연 기자 | 2024-04-15 05:30 송고 | 2024-04-15 08:24 최종수정
순직 경찰 유족 천 모 씨가 3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종합병원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뉴스1 박혜연 기자
순직 경찰 유족 천 모 씨가 3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종합병원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뉴스1 박혜연 기자

약 2개월간 이어진 전공의 집단 사직 여파가 고령인 보훈 대상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보훈병원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수술할 의사가 없어 환자를 거부하는 사례까지 확인됐다.

지난 3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종합병원 입원실에서 뉴스1과 만난 천 모 씨(72)는 "어떻게 공공병원인 보훈병원이 이럴 수가 있느냐"며 "휠체어 타고 국가보훈부에 가서 1인 시위라도 하려고 했다"고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
천 씨는 1994년 경찰이었던 남편 원 모 경위(사망 후 경감으로 승진)가 순직한 후 부산에서 홀로 자녀를 키워내고 4년 전부터 전남 완도군 금일도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가 발생한 것은 지난달 17일 오후 2시쯤. 반찬거리를 만들기 위해 채소를 씻으러 바닷가에 나간 천 씨는 그만 이끼를 밟고 미끄러져 오른쪽 고관절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끔찍한 통증으로 일어서지도 못하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던 상황. 천 씨는 "꼼짝도 못 하고 있는데 밀물이 들어오고 있었다"며 "주머니에 휴대전화라도 없었으면 그대로 물에 잠겨 죽을 뻔했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119에 전화해 기사회생으로 구조된 천 씨는 아들이 살고 있는 서울에서 치료받기를 원했다. 당시 일요일이라 급히 응급실 내원을 문의하는 천 씨 아들에게 중앙보훈병원 측은 "응급실 자리는 있지만 전공의가 없어서 언제 수술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며 "다른 병원으로 가라"고 안내했다고 한다.

천 씨가 구급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4~5시간 동안 아들은 이곳저곳 전화를 돌리며 수술이 가능한 정형외과를 찾았다. 그렇게 겨우 찾은 병원에 천 씨가 입원한 시각은 밤 10시 30분이었다. 사고 발생 후 8시간 30분 만이다.

골절됐던 천 씨의 오른쪽 고관절 부위. 수술 받은 흔적이 드러나 있다. © 뉴스1 박혜연 기자
골절됐던 천 씨의 오른쪽 고관절 부위. 수술 받은 흔적이 드러나 있다. © 뉴스1 박혜연 기자

천 씨는 현재 수술을 무사히 마치고 재활치료를 받고 있지만 이제는 병원비가 걱정이다. 국가유공자 유족은 보훈병원에서 치료받을 경우 진료비의 60%를 감면받을 수 있다. 하지만 보훈병원에서 진료받지 못했기 때문에 천 씨는 800만 원 상당의 수술·간병비를 비롯해 62만 원의 사설 구급차 비용까지 온전히 부담해야 한다.

천 씨는 "지난 2000년에 부산보훈병원에서 왼쪽 종아리 수술을 받았을 때는 진료비 60%를 환급받았다"며 "그것만 믿고 20여 년간 따로 실비보험이나 사고보험을 들지 않았는데 보훈병원에 의사가 없어 진료를 못 받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국가유공자 유족이 보훈병원에서 위탁한 타 병원에서 진료받고 진료비 감면 혜택을 받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나이가 '만 75세 이상'일 때만 적용된다. 천 씨는 1952년생으로 혜택을 받을 수 없다.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에 따르면 지난달 4일 기준 전국 6개 보훈병원에 소속된 전공의 68명 중 59명(86.7%)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근무지를 이탈한 상황이다. 6개 보훈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전공의는 불과 9명으로, 1개 병원에 2명도 안 되는 전공의만 남아있는 셈이다. 또한 지난달 15일 기준 올해 입사 예정이었던 전공의 56명 중 53명(94.3%)이 임용을 포기했고,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전공의 14명 중 10명이 재계약을 포기했다.

천 씨는 의료파업이 계속되는 동안 자신과 같이 보훈병원에서 진료를 못 받은 사례가 또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천 씨는 "보훈병원은 국가가 지원하는 곳인데 진료를 못 받은 보훈 가족을 위해 대책이 마련돼야 하지 않겠나"라고 호소했다.

이봉주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의사 부족 때문에 보훈대상자가 보훈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부득이하게 수술이나 진료를 받을 수밖에 없다면 보훈제도 취지상 긴급 지원 제도를 임시로 활용해서 보훈병원에서 치료받는 것과 같은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중앙보훈병원 측은 "지역응급의료센터로서 중증·응급환자 진료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진료 공백으로 일부 진료과의 휴일 응급수술이 어려운 상황이 발생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중앙보훈병원 측은 "휴일 응급실 이송 환자에 대해서도 기존대로 보훈병원 입원 후 평일 중 응급수술을 시행할 수 있도록 비상진료체계를 강화하는 등 진료 차질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지속 노력하겠다"며 "천 씨와 같은 사례에도 재난 시 의료비용 지원 등 병원비를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에서 환자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2024.3.6/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서울 강동구 중앙보훈병원에서 환자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고 있다.  2024.3.6/뉴스1 © News1 신웅수 기자



hypar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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