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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혈통, 그 기적적 우연성에 관하여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2-03-10 12:00 송고 | 2022-03-16 08:49 최종수정
MMCA VR 제2편 서도호 '카르마'(Karma) / 사진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유튜브
MMCA VR 제2편 서도호 '카르마'(Karma) / 사진출처 = 국립현대미술관 유튜브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이하 '지우학')이 지난 1월 공개돼 보름간 세계 1위를 기록, 또다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우학'으로 스타가 된 배우가 로몬(23·본명 박솔로몬)이다. 신문 피플 면을 보다가 우연히 배우 로몬 기사를 읽게 되었다. 원고지 6매짜리 짧은 기사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건 그의 가계(家系)다. 로몬은 1999년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후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런 집안 환경으로 인해 그는 우리말 외에도 러시아어와 우즈베키스탄어에 능숙하다.
이 세상에 부모를 선택해 태어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어느 부모에게서 태어나느냐는 것처럼 우연성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우연성이 한 사람의 생애에서 차지하는 무게감은 막중하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단일민족을 무슨 대단한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내세워왔다. 단일민족의 환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고정관념에서 볼 때 로몬은 혈통이 복잡하다. 역설적으로, 이런 혈통으로 인해 '지우학'의 로손은 인생에서 다양한 기회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사색이 궁극적으로 삶의 태도에서 포용성과 개방성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로몬 패밀리 기사를 수첩에 메모했다. 발효시키고 증류시키면 뭔가 이야기가 될 것도 같았다. 그 무렵 가수이자 배우인 방송인 김창완씨에게서 카톡으로 짧은 영상을 하나 받았다. 나는 이 동영상을 무심코 열어보고 충격을 먹어 지금까지 정신이 멍한 상태다.
SBS 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를 23년째 진행 중인 김창완씨는 직접 오프닝(첫 부분을 시작하는 말)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아침마다 보내주는 오프닝을 읽다 보면 종종 머릿속에서 얼음이 쩍 하고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자전거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방송국에 나가서 쓰는 짧은 오프닝인데도 통찰과 혜안이 번득인다. 한 일본인 팬은 그의 오프닝을 받아쓴 노트가 무려 21권이나 된다고 한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중인 로댕의 '걷는 남자'. 조성관 작가 제공
  
서도호 "나는 어디서 왔는가?"

그가 보내온 유투브 동영상은 국립현대미술관(MMCA)에서 전시한 설치미술가 서도호의 'Episode 2 / Karma'. 카르마 시리즈의 하나다. 서도호는 명실상부한 세계적 설치미술가다. 알려진 대로 서도호는 서세옥 화가의 아들이다. 오래전 나는 ‘성북동 이야기’를 기사로 쓰면서 서세옥 화가의 한옥을 가본 일이 있다.

Karma.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는 업(業)이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업은 불교 용어로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 '전세(前世)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서 받는 응보(應報)'.

살다 보면 한두 번은 악인을 만나게 될 때도 있다. 직접 그런 경험이 없더라도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이런 격언을 이야기한다.

'인과응보에는 시차는 있어도 오차는 없다.'

서도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본다. 벌거벗은 푸른 색의 남자가 걷는 중이다. 하반신과 상체만 있다. 머리 부분에는 뭔가 매달려 끝없이 이어진다.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가 영어로 말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또 어디로 가는가?…'

마치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전시중인 오귀스트 로댕의 '걷는 남자'를 보는 것 같다. '걷는 남자'는 머리가 없다. 직립 보행을 하는 다리만이 강조된다. 관람객은 두 다리만을 감상한다. 로댕은 하반신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삶에서 두 다리로 걷는 보행이 갖는 의미를 둔중하게 드러낸다. 걷기가 영장류를 인류로 진화시켰다.  

서도호의 '카르마'는 하반신이 아닌 상반신에 주목하게 만든다. 머리 부분을 들여다 보니 웅크린 사람이 어깨 위에 앉아 있다. 부모다. 그 위에는 부모를 탄생시킨 조부모가. 또다시 조부모를 있게 한 증조부, 고조부…. 조상들이 끝없이 이어져 마치 척추뼈처럼 휘어져 있다. 무한대로 뻗어 나간다.

서도호의 '카르마'는 존재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카르마'는 지금 살아 숨 쉬는 '나'라는 존재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조상들의 DNA가 N분의 1로 섞여 있음을 증언한다. 저 수많은 마디 조각 중 어디서 하나만 빠져도 누구도 지금 세상 빛을 볼 수 없다.  

1800년의 프란츠 모차르트와 칼 모자르트. 아버지 아마데우스가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1800년의 프란츠 모차르트와 칼 모자르트. 아버지 아마데우스가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집안은 지금?

지금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혈통은 지구상에 없다. 아마데우스와 콘스탄체는 슬하에 6남매를 두었지만, 유년기를 넘겨 살아남은 사람은 2명에 불과하다. 칼 모차르트(1784~1858)와 프란츠 모차르트(1791~1844). 칼은 외교관으로, 프란츠는 음악가로 각각 생을 살았다. 아버지가 죽기 5개월 전에 태어난 프란츠는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아 음악가가 되었다. 빈에서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 문제는 칼과 프란츠가 결혼하지 않고 생을 마쳐 자녀를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데우스 집안은 다음 대에서 대(代)가 끊겼다.  

아마데우스의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도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음악교육자였다. 레오폴드 역시 자녀를 7명이나 두었지만, 영아기를 넘겨 살아남은 자식은 2명에 불과했다. 난네를과 아마데우스. 아마데우스 역시 어렸을 때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다. 17~18세기까지 영아사망률은 60%를 넘었다. 그러고 보면 아마데우스가 태어나 35년을 살다 간 것만 해도 그 자체로 기적이다.

율 브리너, 그 신비스러움의 비밀

율 브리너(Yul Brynner 1920~1985). MZ세대는 배우 율 브리너를 거의 모른다. 영화 마니아가 아니라면. 그러나 그들의 부모세대는 율 브리너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나는 '황야의 7인'으로 율 브리너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왕과 나'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나는 율 브리너를 처음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던 기억이 난다.

'저 사람은 미국 배우라는 데 얼굴 생김새가 정말 특이하네. 백인도 흑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양인이라고 하기도 어딘가 그렇고. 아랍 사람인가'

호기심은 거기서 멈췄다. 벽촌의 소년은 율 브리너의 눈빛, 잘생긴 두상, 그리고 굵직한 저음에 빠져 그가 나오는 영화를 즐겨 봤을 뿐.

코로나19 이전에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상품이 꽤 인기를 끌었다. 서울에서 불과 3시간 비행기를 타고 가면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져서다. '러시아는 유럽이 아니고,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는 순간 러시아어 알파벳 상호와 낯선 양식의 건축물로 인해 러시아를 실감하지만 동시에 슬라브족과 다른 얼굴들을 대하면 여기가 러시아가 맞나 싶기도 하다.

1960년의 율 브리너 / 사진출처 = 위피키디아
  
블라디보스톡에 처음 가는 여행객이 반드시 가보는 곳이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출발하는 기차역과 율 브린너 생가다. 생가 앞에는 율 브리너의 동상이 당당하다. 율 브리너의 출신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율 브리너가 여기 사람이었어?'라는 반응을 보인다.

'율 브리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태어나 맨해튼에서 눈을 감았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브리너 가계의 파란만장한 파노라마가 응축돼있다. 어린 시절 내가 그의 얼굴과 눈빛에서 낯설면서도 신비스러움을 느낀 것은 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의 유전자에는 독일계 스위스인, 러시아인, 시베리아 몽골인, 로마니(Romani)인의 피가 섞여 있다. 먼저 조부의 혈통을 보자. 조부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다. 스위스에서 살다가 1870년대에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제정러시아가 블라디보스토크를 태평양 진출의 전진기지로 개발할 때다. 조부는 엄청난 도전을 결행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역상으로 성공했다. 조모는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태생으로 부랴트(Buryat) 후예다. 뷔리야트는 시베리아에 사는 몽골계를 말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독일계와 몽골계의 피를 2분의 1씩 받고 태어난 아버지는 광산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의 인생을 살았다. 어머니는 로마니(Romani)인의 후예로 배우·가수 수업을 받은 지식인. 로마니인은 유럽을 떠도는 유랑 민족을 일컫는다. 율 브리너는 위로는 누나가 있었다. 광산 엔지니어는 광산 개발 현장을 따라 떠도는 직업. 율 브리너가 세 살 때 아버지는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여배우와 사랑에 빠져 집을 나갔다.

어머니는 남매를 먹여 살려야 했다. 간난과 신고의 세월이 펼쳐졌다. 어머니는 남매를 데리고 하얼빈으로 간다.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리던 하얼빈에서 남매는 YMCA가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다.

이번에는 전쟁이 이 가족의 운명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진다. 거대한 휘오리 바람이 몰아치는 것을 내다본 어머니는 1932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향했다. 가까스로 파리에 정착한다. 열세살 율 브리너는 파리에서 러시안 나이트클럽에서 기타를 치다가 프랑스 서커스단에 들어간다. 누나 역시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불렀다. 율 브리너는 서커스단에 들어가 5년간 공중그네 곡예를 한다. 하지만 공중그네 곡예사를 하던 중 허리를 다치면서 곡예사를 접고 배우의 길을 간다.

1938년 어머니가 백혈병이 발병하자 남매는 어머니를 따라 다시 고향 하얼빈으로 돌아온다.(이 집안은 시베리아 횡단을 무슨 옆 마을로 이사 가듯 한다) 율 브리너 남매가 극동의 하얼빈에 머문 기간은 2년 남짓. 하얼빈 시절 그는 백계(白系) 러시아인들이 많이 살던 조선의 청진과 함흥을 찾기도 했다.

1940년 어머니는 또 한번 결단을 내린다. 이번에는 태평양이다. 자식들의 장래를 위한 미국행! 일본 고베항에서 출발한 여객선을 타고 미국 대륙을 밟았다. 1941년 브로드웨이에서 단역으로 뮤지컬에 데뷔했고, 1951년 뮤지컬 '왕과 나'로 스타덤에 오른다. '왕'은 태국 국왕 몽쿳 이야기다. 브로드웨이에서 시암 왕국의 '왕' 역할을 할 사람은 율 브리너 밖에 없었다.

율 브리너는 평생 어머니와 어머니의 혈통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예인(藝人)의 재능을 물려주었고 남매를 키워주고 지켜준 사람이 어머니 아닌가. 그는 '국제 로마니 연맹' 명예회장직을 맡아 죽을 때까지 유지하며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외모는 몽골계 조모의 유전자를 더 많이 받았다.
 
서도호의 '카르마'는 한 번만 보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사람은 생김새뿐 아니라 목소리와 성정(性情)까지도 부모를 닮는다. 의학자들에 따르면 꾸준함과 참을성도 물려받는다. 율 브리너의 종유굴 저음은 몇 대 할아버지를 닮은 것일까. 리처드 도킨스의 유전자 결정론을 다시 읽지 않을 수 없다.

문득, 서정주의 시 '자화상'의 한 구절이 스쳐 지나간다. 우리 모두의 자화상은 조상이 물려준 유전자의 모자이크다. '카르마'가 다시 말을 건넨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외부 필진의 글은 뉴스1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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