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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변정희 살림 대표 "낙태죄 개정안…'보완' 아닌 '폐지'로 가야"

"정부, 특정 시기까지만 낙태 허용 규정해 갈등 구도 부추겨"
"개정안 마련 과정서 정치권과 여성계 소통 거의 없어"

(부산=뉴스1) 노경민 기자 | 2020-10-23 07:00 송고 | 2020-10-23 09:38 최종수정
변정희 살림 대표가 19일 뉴스1과의 인터뷰를 하고 있다.(살림 제공) /©뉴스1
변정희 살림 대표가 19일 뉴스1과의 인터뷰를 하고 있다.(살림 제공) /©뉴스1

"정부가 죽어가는 낙태죄를 되살렸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낙태죄 개정안에 여기저기서 시끌시끌하다.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는 낙태 행위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형법이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한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재가 12월31일까지 낙태죄 관련법 조항을 개정하라고 요구하면서 정부는 뒤늦게 후속 조치를 내놨다.

24주의 현행 낙태 허용 범위가 14주 이내로 수정됐고, 미성년자는 보호자 동의를 받기 어려운 경우 상담 사실 확인서만 있으면 낙태 시술을 할 수 있게 됐다.

낙태죄 강도가 어느 정도 완화된 점은 분명해 보이지만, 변정희 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대표는 오히려 형법을 되살린 사례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 오랫동안 사문화돼 왔고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성을 인정받은 낙태 처벌 규정을 정부가 되살려낸 '역사적 퇴행'으로 규정했다.

의료계 및 종교계 등도 여성단체와 같이 이번 낙태법 개정안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여성단체와 달리 낙태죄를 없애선 안 된다며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들 간 치열한 갑론을박은 당분간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최초 성매매 집결지인 부산 서구 완월동 폐쇄 작업에 힘써온 변 대표는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이곳을 인권보호 지대로 탈바꿈하겠다는 청사진을 그리고 있는 부산의 여성 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뉴스1>은 19일 낙태죄 개정안에 대한 변 대표의 생각을 들어봤다.

다음은 변 대표와의 일문일답.

―최근 정부의 낙태법 개정안 입법 예고를 전반적으로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정부가 죽어가는 낙태죄를 되살렸다. 이것은 헌법재판소의 취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고, 앞으로의 방향성에서도 전혀 맞지 않는 후퇴한 법안이다. 해묵은 'pro-life'(낙태에 반대하는 입장), 'pro-choice'(낙태에 찬성하는 입장)와 같이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는 대립 구도를 헌재가 해소하고자 지난해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렸다. 정부의 입법 개정안은 특정 시기까지만 낙태 허용 범위를 규정해 오히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문제와 관련한 갈등 구도를 더 첨예하게 만들어버렸다. 이와 관련해 여성단체들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지켜보고 있다.

―당초 정부가 어떤 입법 예고를 내놓을 것으로 예상했나.

▶낙태법이 폐지될 것이란 기대감이 깔려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형법 상에서 여성을 처벌하거나 규율하는 방식이 아닌, 태아의 생명권은 물론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완할 수 있는 법을 고민하길 바랐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 버렸다. 오히려 형법을 되살린 사례로 판단하고 있다.

―여성단체 측은 그동안 낙태법 '폐지'를 주장했으나, 이번 입법 예고를 보면 '보완'의 성격에 가까운 것 같은데.

▶낙태는 여성의 생명권과도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형법상 여성을 처벌하거나 의료진을 처벌하는 방식으로 가게 되면, 여성의 권리는 사라져 버리고 태아의 생명이 더 위험해진다고 생각한다. 낙태했다고 해서 여성에게만 '유죄'라는 프레임을 씌워선 안 된다. 임신이라는 것은 단순히 여성만의 책임뿐만 아니라 남성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미성년자의 경우 보호자 동의 없이 상담 확인서만 있으면 낙태 시술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은데.

▶실제로는 법안의 실효성이 의심되는 부분이다. 보호자의 개입은 미성년자의 출산과 낙태 과정에 있어 오직 미성년자의 건강을 고려했을 때에만 중요한 의미를 띄어야 하고 고려돼야 한다. 개정 모자보건법에서는 16세 미만이 법정 대리인의 학대 등의 상황에 있을 경우 동의 대신 상담의견서로 대체할 수 있게 했으나, 학대 정황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또 상담의견서 발급에 있어서 실제 개정안 제14조2의 제4항에서는 상담 사실확인서 작성 시 임신 출산 종합상담기관장은 필요한 경우 아동복지심의위원회의 자문을 들을 수 있다고 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 과정이 실제 임신한 청소년에 대한 지원 과정에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이번 입법 예고에서 '미프진 허용'이 눈에 띈다. 인공유산을 유도하는 약물이라 한국에서는 불법으로 간주해 왔었는데, 오·남용이 일어날 것이란 비판이 많다.

▶미프진은 이미 많은 국가에서 안정적인 시술 방법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낙태 시술의 위험성에 비해 미프진과 같은 인공유산 유도 약물이 훨씬 안정성이 보장돼 있다. 미프진은 여성의 건강권, 의료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것을 편의적으로 받아들여선 안 되고, 보다 더 효율적인지에 대해서 판단해야 한다. 미프진이 안전성만 검증되면 시술보다 훨씬 나은 낙태법이라고 생각한다. 미프진을 통해서 의료 시술이 좀 더 개선돼야 한다.

―그동안 낙태법 개정안과 관련해 정치권과 여성단체에서의 소통이 있었나.

▶없었던 것 같다. 정부는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아무런 논의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에 한국여성단체연합이 국무조정실 면담을 요청했지만, 총리 일정과 형평성 문제로 만나기 어렵다고 해 성사되지 않았고, 법무부 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의 ‘임신중지 비범죄화’ 권고도 무시됐다. 헌재 판결 취지를 정부가 잘 수렴하는 과제가 일차적으로 필요하다.

―보수계 및 종교계뿐만 아니라 산부인과협회도 '낙태시술 거부권'을 주장하며 이번 입법 예고에 대해 반대 의사를 보이는데, 폐지를 주장하는 여성단체와 견해차가 큰 것 같다.

▶생명 존중 사상을 여성계가 무시한다는 종교계의 주장은 잘못된 발언이다. 낙태법 개정안 문제를 대결 구도로 양산해서 갈등을 부추기며 잘못된 길로 빠져들고 있는 오류다. 앞서 말했다시피 태아의 생명권은 여성의 생명권과 직결돼 있다. 임신 주차가 늘어날수록 위험해지는 것은 여성이다. 지속가능한 육아와 돌봄을 고민해도 모자라는 상황에서 여성을 처벌하는 것은 지나치게 낡은 사상일 뿐이다.

―낙태법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해외 사례가 있는가.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에 따르면 캐나다에선 1980년대에 이미 낙태죄의 효력이 상실됐다. 대법원에서 낙태죄에 위헌 결정을 내린 이후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임신 중지에 어떤 제한도 두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인공임신중절 건수는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호주에서도 주마다 낙태죄를 대체하는 임신중지법, 재생산 건강법 등이 제정됐다. 임신 중지를 하려는 여성은 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는 조항을 명시하기도 한다. 빅토리아주의 경우 임신 후기 때 임신 중지에 대한 제한 조항은 있지만 처벌은 하지 않는다. 임신 막바지 때도 의료적 환경과 임신한 여성의 심리적, 사회적 미래 환경을 고려하여 임신 중지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뉴사우스웨일스주는 임신한 여성이 원할 때 임신 중지에 대한 상담과 정보를 제공하도록 한다.

―앞으로 개정안을 바꾸기 위해 어떻게 움직일 계획인가.

▶국회 입법 청원 및 청와대 국민 청원을 진행하고 있다. 국회에 직접적인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한 다양한 온라인 액션을 취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 낙태죄 관련해서 아카이빙 사이트를 오픈했다. 여기에서 논평 및 기자회견 등을 공유하고 있다.

―다른 이슈를 좀 이야기해 보자. 부산 서구 완월동 성매매 집결지 폐쇄 작업은 현재 어떻게 진행 중인가.

▶완월동은 일제가 만든 우리나라의 최초 성매매 집결지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지역이다. 지난해 12월 부산시의회에서 완월동 여성을 위한 자활지원 조례안이 통과됐다. 올해는 완월동 일대를 국토교통부에 도시재생 뉴딜 사업으로 신청한 상태다. 1차 심사는 통과했으며, 나머지는 올해 12월에 결정난다. 최종 선정되면 5년간 300억원이 지원된다. 도시 재생을 통해 완월동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필요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20대를 주축으로 한 성갈등이 역대 가장 극심한 상황이다. 세대 갈등보다 더 심하다는 평가도 있는데, 여성단체는 이를 어떻게 지켜보고 있나.

▶성갈등은 세대갈등과 중첩돼 있다. 여성운동에서 비판하는 것은 가부장적인 사회 구조와 문화다. 사회 기득권 대부분이 50대 이상 남성 위주로 구성돼 있는데, 20대 남성은 본인이 기득권을 가질 기회 자체가 거의 없다. 이 점에선 한편으로는 이해는 하지만, 모든 문제의 원인이 여성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도 여성이 성갈등의 원인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현상에 대해선 안타깝게 생각한다.

또한 우리 사회에서 같이 성찰하는 목소리를 낼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여성이 이긴다고 해서 남성이 진다거나, 여성이 진다고 해서 남성이 이기는 것이 아닌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blackstamp@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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