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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형 성폭력, 이젠 참지 않아"…숨죽여온 '乙의 반격'

[을의 역습①] 미투 얼마나 됐다고…오거돈·박원순 또 터져
"과거 회귀 안돼" 변화 조짐…2차 가해 등 갈길 아직 멀어

(서울=뉴스1) 심언기 기자 | 2020-07-18 10:15 송고 | 2020-07-19 16:25 최종수정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 News1 김일환 디자이너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서 촉발된 '미투(Me Too)' 운동이 2년이 지난 2020년 대한민국을 다시 뒤흔들고 있다. 비뚤어진 성(性)인지 감수성이 그만큼 광범위하게 이 사회를 덮어왔다는 방증이자, 더 이상은 인내할 수 없다는 단호한 경고음이다.

오거돈·박원순 전 시장의 잇단 성추행 의혹은 권력형 성범죄의 전형적 양상이다. 정치권 뿐 아니라 문화·예술계 등에서 그간 나온 미투 주장 역시 대부분 이 범주에 속한다. 성폭력에 더 이상 숨죽이지 않겠다는 여성들의 권리찾기는 이제 막 첫 걸음을 뗐을 뿐이다.
◇처벌 안 된 성범죄 전례, 피해자만 '더 큰 불이익' 공포감

1964년 꽃다운 18살의 소녀였던 최씨는 강간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 법원은 성폭행을 방어하기 위한 정당방위라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올해 74세의 최말자씨는 지난 5월 중상해죄 유죄 판결을 바로잡아달라며 56년만에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한 인간으로서 기본적 인권과 남녀 간 차별 없는 평등은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돼 있다. 하지만 권위주의·군부독재 시대상과 뿌리깊은 '남존여비' 유교 사상의 혼재 속에 현실은 여성에 일방적 침묵 또는 희생을 강요했다. 최씨 유죄판결은 부끄러운 우리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례다.
권력형 성범죄가 단죄받지 않은 대표적 사건으로는 '장자연 사건'도 꼽힌다. 유력 언론·기업인 등이 연루된 의혹이 크게 불거졌지만, 사망한 장씨의 주장을 입증하지 못해 진실이 규명되지 못했다. '장자연 문건' 등의 실체 역시 함께 묻혔다.

이같은 과거 수사당국과 사법부의 이중잣대는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무디게 하는 '마약'과도 같은 사례로 지적된다.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고 피해자만이 더 큰 불이익을 받아온 선례는 여성들의 적극적 피해호소를 가로막는 족쇄가 됐다.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2032년 35회 하계올림픽 유치신청 도시 선정을 위해 열린 대의원 총회에서 서울시가 유치도시로 선정 된 후 박원순 서울시장이 오거돈 부산시장의 축하를 받고 있다.2019.2.11./뉴스1 © News1 김정수 기자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서 2032년 35회 하계올림픽 유치신청 도시 선정을 위해 열린 대의원 총회에서 서울시가 유치도시로 선정 된 후 박원순 서울시장이 오거돈 부산시장의 축하를 받고 있다.2019.2.11./뉴스1 © News1 김정수 기자

◇'미투' 운동에도 잇단 권력형 성폭력…"이젠 끝장" 인식 확산

암묵적으로 가해지는 권력형 성추행이 수면 위로 부상한데는 서지현 검사의 미투가 결정적이었다.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으로부터 '장례식장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글을 검찰 내부망에 올려 대한민국 미투 운동의 첫 신호탄을 쐈다.

서 검사에 이어 세상에 용기를 낸 이는 김지은씨다. 대권주자로 오르내리던 유력 정치인인 안 전 지사의 성폭행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김씨는 우리사회 미투 운동 역사에 한 획을 그었고, 안 전 지사는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고 복역 중이다.

서 검사와 김씨의 폭로는 문화·예술계, 연예계 미투 운동으로 번지는 기폭제가 됐다. 바늘귀 통과에 비유되는 등용문에 들기 위해 신인 작가, 무용, 연예인들은 불합리한 처우를 감수해야 했다. 이중 여성들에게는 성희롱·추행과 같은 성범죄가 만연한 현실이 속속 드러났다.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자 뒤늦게 정부가 실태조사에 나섰다. 현실은 충격적이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공개한 '문화분야 성인지 인권환경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공연예술·대중문화·출판 등 문화예술 분야 종사자의 11~34%가 '성폭력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의 절반에 달하는 49.0%는 '주변사람의 성추행을 목격하거나 전해들은 경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가해자로는 △선배 예술가(71.3%) △ 교수·강사(50.9%) △기획자(30.8%) 순으로 나타났다. 주로 위계에 의한 갑(甲)의 성폭력 가해가 만연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권력자들의 성폭력은 미투 운동이 한 차례 불붙어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진 이후에도 이어졌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보좌진을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나 부산시장에서 사퇴했다. 그는 현재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오 전 시장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이 또 다시 터졌다. 박 시장이 사망하면서 성추행 의혹 진실 규명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여러 정황들은 그의 성추행 사실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의 잇단 문제제기는 남성중심 사회가 스스로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에서 출발했다. 극한까지 몰린 피해자들의 마지막 선택지이기도 했다. 우리사회 구성원 대다수도 더 이상 권력형 성폭력을 눈 감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수 십년간 고착화된 남녀 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기까지는 여전히 적지 않은 난관이 남아있다. 대표적으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꼽을 수 있다. 피해를 당하고도 음지로 숨어야 하고 일과 직장, 커리어 등에 있어서 불이익도 여전히 적지 않다.

그나마 2차 가해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긍정적이다. 미래통합당 이종배, 양금희 의원 등은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성폭력처벌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박 전 시장 의혹을 겨냥한 정치적 목적이 다분한 법안이지만, 성폭행 피해자를 보호하고 구제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야당 한 의원실 관계자는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 사례를 겪으며 정치권에는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 같다. 구설에 오르면 끝장난다는 것"이라며 "갑을 관계는 변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성 관련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제 과거로 회귀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onk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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