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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프라하, 나치, 아이히만, 그리고 홍위병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0-03-12 12:00 송고 | 2020-03-13 09:55 최종수정
프라하 핀카스 유대교회에 기록된 희생자들. 조성관 작가
프라하 핀카스 유대교회에 기록된 희생자들. 조성관 작가

유럽 도시들을 여행할 때마다 일부러 시간을 내서 찾아가 보는 공간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유럽도시들이란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들이다. 그런 도시들에는 대개 같은 테마의 조형물을 만들어놓았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내가 어떤 조형물을 말하려 하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다. 유대인 희생자 추모기념물(비)다. 2차세계대전 기간 중 희생자는 5000만명. 그중 유대인이 600만명이다. 유럽 유대인의 3분의 2, 세계 유대인의 3분의 1이다.
프라하(체코), 빈(오스트리아), 바르샤바(폴란드), 파리(프랑스), 뮌헨·베를린(독일), 암스테르담(네덜란드)…. 이들 도시에는 2차세계대전 중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처형된 수많은 유대인의 넋을 위로하는 다양한 형태의 추모비를 만날 수 있다.

프라하에는 유대인 묘지가 두 곳 있다. 하나는 유서 깊은 구시가광장과 붙어 있는 옛 유대인 구역의 묘지고, 다른 하나는 시 외곽의 신(新) 유대인 묘지다. 구(舊) 유대인묘지에는 유대인희생자 추모관이 있다.

이곳에 들어가면 나치 점령기 프라하에서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희생된 유대인들의 이름과 생몰연대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린아이들까지 나치 독일에 의해 학살된 체코인들.
600만 명이란 숫자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보통 숫자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다 보면 금방 가슴이 먹먹해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떠올라서다. 페이소스(pathos)를 불러온다. 복받치는 슬픔에 숨을 쉬기가 힘들어진다.
  
프라하 신 유대인묘지의 카프카 가족묘. 묘비 아래쪽에 카프카 여동생 세 명의 이름이 보인다. 조성관 작가

카프카가 만일 요절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는 新유대인묘지로 가보자. 신유대인묘지는 구유대인 묘지가 매장 공간이 부족해지자 20세기 들어 시 외곽에 조성되었다. 이곳을 찾는 여행자 대부분은 21구역을 찾아간다. 그곳에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가족묘가 있어서다. 독신으로 살다 간 프란츠 카프카는 부모와 함께 잠들어 있다.

비석 아래쪽에 세워진 직사각형 오석(烏石) 석판이 눈길을 끈다. 프란츠 카프카의 여동생 세 명의 이름이다. 이들은 1889~1892년에 태어났다. 그런데 이들의 사망 연도는 나치 치하인 1942~1943년이다. 모두 강제수용소에서 숨졌다는 뜻이다. 유해는 찾을 길이 없지만 가족묘에 따로 이름을 새겨 넣어 세 자매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다.

맨 아래쪽에 있는, 1892년에 태어난 막내 여동생이 오틸리에 카프카다. 오빠의 비범함을 일찍이 알아보고 오빠의 글쓰기를 적극적으로 돕고 응원한 여동생이다. 만일 프란츠 카프카가 마흔한 살에 폐결핵으로 요절하지 않고 더 오래 살았다면 틀림없이 여동생들처럼 강제수용소에서 참변을 당했을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20세기 들어 전체주의 체제를 48년간 경험했다. 나치독일 7년과 공산주의 41년이다. 프라하에는 전체주의 시대를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페트진 공원이다. 관광객들은 거의 찾지 않는 곳이지만 페트진 공원에서는 파시즘의 실체를 느낄 수 있다.

페트진 공원에는 체코가 자랑하는 조각가 올브람 조우벡이 2002년에 제작한 조각 작품이 설치되어 있다. 제목은 '폭정'(despotism). 산비탈에 계단을 설치했고 그 위에 사람 조각 여섯 개가 보인다.  

맨 앞에 있는 사람은 신체가 멀쩡하다. 두 번째 사람은 상반신 일부와 얼굴 일부가 훼손되었다. 세 번째 사람은 상반신 절반과 팔 하나, 그리고 얼굴 절반이 사라졌다. 네 번째 사람은 상반신 일부와 얼굴 일부만이 남았다. 다섯 번째 사람은 머리가 사라졌고 상반신 일부와 하체 일부만 있다.

마지막 여섯 번째 사람은 하반신 일부만 보인다. 맨 아래 사람부터 맨 위 사람까지 감상하고 나자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졌다. 늦봄인데도, 나는 한기(寒氣)를 느꼈다. 공산주의 폭정을 고발한 어떤 텍스트도 끌어내지 못한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마치 알프레도 히치콕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나치 장교 시절의 아돌프 아이히만(왼쪽),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서 증언을 청취하는 아돌프 아이히만
나치 장교 시절의 아돌프 아이히만(왼쪽),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서 증언을 청취하는 아돌프 아이히만
아이히만은 괴물(怪物)이었나?
  
1961년 4월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세기의 전범 재판이 열렸다. 2차세계대전 종전 후 1급 전범으로 지명수배를 받아온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재판이었다. 아이히만은 나치독일 패망 직전 아르헨티나로 도주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이름을 숨긴 채 숨어 살다가 1960년 5월, 이스라엘 비밀정보부에 체포되어 15개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책'을 기획한 나치 친위대 장교였다. 아이히만은 사형이 선고돼 1962년 5월31일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유해는 화장해 바다에 뿌려졌다.

아이히만 재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 세기적 전범 재판은 사상 최초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 이스라엘 제작자 밀턴 프루트만과 다큐멘터리 감독 레오 허위츠의 합작품이었다. 유럽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에서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재판을 텔레비전으로 시청하거나 라디오로 들었다.  

미국에 거주하던 유대계 독일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저서 '전체주의 기원'으로 파시즘의 실체를 파헤쳐 세계적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아렌트는 아이히만 재판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뉴요커'지 예루살렘 특파원을 자청해 1년 동안 진행된 재판의 전 과정을 취재했다.

재판이 끝난 뒤 '뉴요커'지에 특집 기사를 5회 연재한다. 이 연재원고에 살을 붙여 1963년 발간한 책이 명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이다. 부제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이 부제가 책 전체의 주제를 관통한다. 아이히만은 평범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런 사람이 광기의 신념에 세뇌되자 돌변한다. 그는 증언석에서 주장한다.

"나는 명령에 따랐을 뿐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아무런 관계도 없다." "행정적 업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살상은 내 일이 아니었다." 아이히만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참회의 눈물 같은 건 한 방울도 없다.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
그가 입안한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책'을 다시 보자. 그는 '최종적 해결책'이라고 했을 뿐 다른 의미는 없다고 주장한다. 일상 언어와 행정 언어를 완전히 분리했다. 단어의 의미를 휘발시켜 생각하는 능력을 없애버린 것이다. 히틀러는 나치 조직의 구성원을 '무사유'(thoughtlessness)의 인간으로 개조해 홀로코스트에 참여시켰다. 이들은 도덕적인 판단은 하지 못했다. '국가 사회주의자가 보여주어야 할 마땅한 열정'으로 그랬을 뿐이다.      

2017년에 나온 영화 '더 아이히만 쇼'는 이 세기적 전범 재판을 TV 다큐멘터리로 제작하는 전 과정을 다룬 영화다. 허위츠 감독은 재판장의 허락을 받은 상태에서 아이히만과 방청객이 눈치채지 못하게 재판정에 카메라를 설치한다. 카메라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을 지켜보는 아이히만의 표정에 초점을 맞춘다. 허위치 감독은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근원'을 보여주려 했다. 아이히만은 시종 아무런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증언을 청취한다. 생존자 112명이 처참한 증언을 해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더 아이히만 쇼'는 말한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누구라도 그런 괴물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남들보다 우월하다거나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느껴 코 생김새나 신을 섬기는 방법이 다르다고 사람을 증오한다면 언제든 제2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감독은 묻는다. 히틀러의 머리를 날려버렸다고 파시즘이 사라졌느냐고. 독재는 인간의 공적 영역을 통제하지만 파시즘은 인간의 사적 영역까지 통제한다.

모택동이 주동한 문화대혁명의 홍위병(紅衛兵)들이 바로 신념의 광기에 빠진 자들이었다. 제2의 아이히만이었다.

코로나19 사태에서 21세기 홍위병들이 또다시 창궐했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에 관한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진다. 얼마나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세계가 지금 중화인민공화국의 파시즘을 목격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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