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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장군' 123년만에 돌아왔다…전봉준 동상 제막

종로 네거리 앞 순국터에 국민모금으로 건립
박원순 "장군 뜻 이어 새로운 대한민국 만들자"

(서울=뉴스1) 장우성 기자 | 2018-04-24 17:24 송고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전옥서 터 앞에서 열린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전봉준 장군 동상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2018.4.24/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린동 전옥서 터 앞에서 열린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제막식에서 참석자들이 전봉준 장군 동상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2018.4.24/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들꽃들아/그날이 오면 닭 울 때/흰 무명 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귀를 기울이라’

잔뜩 찌푸린 하늘에 강풍이 몰아치던 서울 종각 네거리. 불현듯 거짓말처럼 바람이 잦아들었다. 안도현 시인의 '녹두장군' 전봉준 추모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낭송되던 순간이었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영풍문고 앞에서 ‘전봉준 장군 동상 제막식’이 열린 24일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1855~1895)이 순국한 지 딱 123년이 되는 날이었다.    

1895년 전봉준 장군은 충남 공주 우금치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한 뒤 ‘전옥서’에 갇혔다. 사형판결을 받은 바로 다음날인 4월24일 새벽 2시 교수형을 당했다. 바로 지금의 영풍문고 빌딩 앞 터다.    
사형 선고 후에도 "나를 컴컴한 도둑의 소굴에서 죽이려 하느냐. 내 피를 종로 네거리에 뿌려라"며 기개를 잃지않던 그는 죽음에 앞서 ‘운명’이라는 이름의 유언시를 남겼다.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내 뜻과 같더니/운 다하니 영웅도 스스로 어쩔 수 없구나/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더냐/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랴’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녹두장군이 한 세기가 지나 서울의 중심에 우뚝 섰다. 그가 우금치의 분루를 머금고 눈을 감은 종로는 이후 3.1운동, 4.19혁명, 6.10민주항쟁을 거쳐 지난해 촛불집회 등 격변하는 한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무대로 자리잡았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제막식 축사에서 “동학의 반봉건, 척왜척화 정신은 민주·민족·민권정신으로 현대사까지 이어졌다”며 “전봉준 장군의 큰 뜻을 받들어 서로 하늘같이 섬기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자”고 강조했다.

동상 건립은 동학혁명 100주년인 1994년부터 거론됐으나 구체화된 건 2016년 동상건립추진모임이 구성되면서부터다.

관건은 동상이 들어설 터였다. 동상건립추진위원회가 점찍은 영풍문고 앞 전옥서 터는 서울시 땅이라 시의 협조가 필요했다. 박원순 시장이 그해 8월 전주에서 열린 동학혁명 기념식에서 기념사업회 측의 제안을 받고 적극적인 검토를 약속하면서 물꼬를 텄다.

동상 건립을 계기로 동학혁명 기념사업도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유성엽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민주평화당)은 이날 제막식에서 "동학혁명일의 국가기념일 지정, 헌법 전문에 동학혁명 정신의 반영도 필요하다"며 "동학혁명 참여자도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전봉준 장군 동상은 정부나 기업의 도움없이 국민 모금으로만 2억7000만원을 모아 제작됐다. 높고 위압적인 기존 동상들과도 다르다. 2.8m 정도의 높이에 앉아서 사람들과 눈을 맞추는 모습이다. 주변 도시경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민중의 벗'인 녹두장군의 풍모를 살렸다.   
이이화 전봉준장군동상건립위원회 이사장은 "전봉준 장군 동상이 오래오래 외침에 저항한 민족운동의 상징물로 평등과 자주의 가르침을 익히는 청소년의 학습장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never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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