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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인터뷰③] 차범근 "별나라 외계인과 축구하는 것은 아니잖나"

(서울=뉴스1) 임성일 기자 | 2018-01-01 06:02 송고
월드컵은 영광스러운 무대지만, 선수들에게는 부담이 되고 또 두려운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은 '할 수 있다'고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 News1 박세연 기자
월드컵은 영광스러운 무대지만, 선수들에게는 부담이 되고 또 두려운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범근 감독은 '할 수 있다'고 격려의 메시지를 보냈다. © News1 박세연 기자

스포츠는, 소위 전력이라고 말하는 객관적 지표에서 우위를 점하는 팀이 승리할 확률이 높다. 쉽게 말해 잘하는 이들이 이긴다. 하지만 '꼭'이나 '무조건'이 통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이변과 반란 등으로 표현되는 불확실성은 스포츠의 빼놓을 수 없는 묘미고 그렇게 작성되는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선사한다. 2002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가 그러했던 것처럼.

어느덧 16년 전 과거가 된 2002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한국 축구의 월드컵 4강은, 전 세계가 그저 놀랐고 우리 스스로도 '기적' 외에는 달리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냥 땅에 떨어져 있던 행운을 잡았던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기술이 부족한 것을 따라잡기 위해 당시 태극전사들은 혀를 내두르게 했던 체력과 정신력과 조직력을 선보였다. 그래도 모자란 것은 '붉은악마'의 기운을 빌렸다. 하나가 아닌 전체로 완성시킨 작품이다.
차범근 감독도 같은 맥락에서 응원을 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축구의 그것이 세계무대, 특히 월드컵과는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차범근 감독도 "우리는 약체이고 도전자"라고 했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별나라 사람들과 축구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지금은 실시간으로 상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차피 다 예상 가능한 수준"이라는 말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힘을 북돋았다. '함께'라면 두려울 것 없다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월드컵에서 한국은 분명 도전자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똘똘 뭉쳐서 대회를 준비해야한다. © News1 박세연 기자
월드컵에서 한국은 분명 도전자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똘똘 뭉쳐서 대회를 준비해야한다. © News1 박세연 기자

▲ 최영일과 홍명보와 김남일도 머리가 쭈뼛했던 월드컵

차범근 감독은 월드컵 무대를 가리켜 "축구를 하는 사람에게 월드컵에 참가한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다.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대"라고 말하며 "흥분도 되고 기대감도 있다. 물론 부담이 없다면 거짓"이라고 전했다. 어느덧 9회 연속 월드컵 진출. 이제 팬들은 '당연히 나가는 곳'으로 여겨지는 곳이 됐으나 당사자들에게는 마냥 웃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직접 경험해본 이들이 아니라면 그 무게감을 짐작키도 어렵다.  현역 시절 '미우라 킬러' '악바리 수비수'로 명성을 떨쳤던 최영일 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월드컵이라는 무대는 다른 경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중압감을 준다. 긴장감이 보통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경기를 앞두고 소변을 3번이나 보고 필드에 들어갔다. 돌아서면 또 소변이 마려울 정도로 긴장됐다"고 회상했다.

'떨림'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영원한 캡틴 홍명보 현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는 "1990년 월드컵부터 참가했는데 긴장감은 매번 똑같았다. 솔직히 2002월드컵 때는 긴장을 넘어 무섭기까지 했다"는 뜻밖의 고백을 전한 바 있다. 터프가이의 대명사이자 '진공청소기'였던 김남일 현 A대표팀 코치는 "똑같은 A매치라도 월드컵에서 다는 태극기는 무게가 다르다. 에스코트 키즈의 손을 잡고 경기장에 들어설 때는 정말 머리칼이 쭈뼛 선다"고 말했다.
화려함 이면에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두려움이 있기에 선배들이나 관계자들의 입에서는 "그래도 월드컵 본선을 앞두고는 비난보다는 격려와 박수가 필요하다"고 공통된 목소리가 나온다. 팔이 안으로 굽어 무조건 감싸고 드는 게 아니다. 그 응원마저 없다면 선수들은 기댈 곳이 없는 까닭이다.

한 대표선수는 "여론이 너무 안 좋을 때는, 이번 경기 결과가 또 좋지 않으면 팬들의 원성이 쏟아질 것이라는 걸 알고서 주눅 들어 필드에 들어갔다. 선수들 모두 같은 생각이라 도무지 분위기를 띄울 수가 없었다"면서 "잘하려고 의욕을 보이는 것보다는 그저 실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정도"라는 뜻을 전한 바 있다.

비판이 적절한 긴장감을 유발하는 자극제로 쓰이는 긍정적 효과를 넘어 몸을 경직되게 만드는 부작용을 일으킨 예다. 그래서일까. 차범근 감독의 조언은 달랐다.
차범근 감독은 혼자서 힘들면 둘이, 셋이 달려들면 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축구이기에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News1 박세연 기자
차범근 감독은 혼자서 힘들면 둘이, 셋이 달려들면 된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축구이기에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News1 박세연 기자

▲ 혼자서 힘들면 둘이 아니면 셋이 아니면 11명이

차범근 감독은 과거 분데스리가 시절을 회상하면서 "독일에서 뛰던 10년 내내 두려움에 떨었다. 나도 잘했지만, 나보다 잘하는 선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면 어떻게 하나, 주말마다 긴장했다. 나만이 아는 공포가 있었다"는 고백을 전한 바 있다. 그때를 언급하면서 월드컵을 준비하는 선수들이 무서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조언을 청했다.

차 감독은 "그때랑 지금은 비교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르던 곳에서 뛰어야했다. 경험하지 못한 이들과 싸워야했으니 공포감이 들었던 게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다 보이는 이들 아닌가. 우리는 몇 달 전 잡지에 나온 정보만 가지고 해외 선수들과 겨뤘다. 하지만 지금은 라이브로 그들의 플레이를 볼 수 있다"면서 "꿈에서나 보았던 세계와 싸웠던 우리와는 다르다. 예측 가능한 상대를 보고 준비할 수 있는 시대"라고 칭했다. 자신이 더 힘든 싸움을 이겨냈다는 게 아니다. 자신감을 불어 넣는 메시지였다.

그는 "여전히 월드컵은 최고의 선수들이 나오고, 우리보다 나은 팀들과 겨뤄야한다. 선수들의 부담이 많을 것"이라고 고충을 이해한 뒤 "그래도 별나라에 사는 이들이 내려와서 축구를 하는 것은 아니다. 나 혼자서 부족하다 생각하면 둘이 달려들면 된다. 둘도 부족하면 셋이 뛰면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 축구라서 가능한 일이다. 안 되면 11명이 같이 뛰어라"라며 따뜻한 미소를 보냈다.

긴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전한 당부는, 축구계의 선배로서 후배에게 전하는 일종의 부탁이기도 했다. 워낙 어려운 상황에 놓인 축구계를 위해 러시아 월드컵에 나갈 대표선수들이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져달라는 바람이었다.

차 감독은 "지금 우리 축구는 절박하다. 그것을 선수들이 피부로 좀 느껴줬으면 싶다. 지금의 매듭을 풀 수 있는 것은 일단 선수들, 월드컵에 나가는 선수들"이라면서 "'우리 축구가 위기다', '내가 한국 축구를 구해야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월드컵에 임해주길 바란다. 그렇게 된다면 감독이 무언가를 먼저 이야기하기 전에 선수들 스스로 무엇을 준비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진짜로 한국의 축구를 '대표'한다는 사명감과 자긍심이 있을 때만이 별나라 외계인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두려워하는 독일이나 아르헨티나도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lastuncl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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