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이소룡과 애나 메이 웡, 그리고…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2-12-29 12:00 송고 | 2022-12-29 13:32 최종수정
영화 '사망유희' 포스터 /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사망유희' 포스터 / 사진=네이버 영화 

일상에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코스프레가 있다. 미디어에서 이 코스프레는 1970년대를 소환하는 도구로 곧잘 사용된다. 코미디, 드라마, 영화에서 이 코스프레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검정테를 두른 노란색 트레이닝 복. 검은색 줄의 노란색 트레이닝복은 곧 이소룡(李小龍, 리샤오룽)이다. 영어명 브루스 리(Bruce Lee).

얼마 전 한 종합편성채널에서 '엉클'이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이 드라마에서 주인공 왕준혁(오정세 분)이 누나, 조카와 함께 '왕소룡 일가'로 변신하는 장면이 나왔다. 왕준혁이 호신술을 배워야 한다며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쌍절곤을 휘두른다.  
어린 시절 나는 '할리우드 키즈'와는 동떨어진 환경에서 자랐다. 내 고향 청양의 읍내에 영화관이 하나 있었는데, 인구가 줄면서 그마저도 문을 닫았다. 이런 환경에서도 내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홍콩 무협영화가 있었다.

1967년에 나온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한쪽 팔을 잃고도 오랜 세월을 견디며 원수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는 영화를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게는 '외팔이 검객'으로 각인되었다.

시골 소년은 '외팔이 검객'에 열광하면서도 외팔이 검객을 연기한 배우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짧막한 그의 부고 기사를 접하고서야 비로소 그 액션 배우의 이름이 왕위(王羽)라는 사실을 알았다. 왕위는 1960~1970년대 홍콩 무협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73년의 이소룡 / 사진=위키피디아 
1973년의 이소룡 / 사진=위키피디아 
홍콩 무협영화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이소룡이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이소룡이라는 배우의 출현으로 액션 영화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칼의 시대'에서 '발과 주먹의 시대'로 전환.  
그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님을 따라 어린 시절을 홍콩에서 보낸다. 다시 미국으로 와 시애틀에서 고교와 대학에 다녔다. 이후 할리우드의 문을 두드렸지만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가 액션 스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홍콩에서다. 1971년작 '당산대형'이 세계적인 액션 스타의 탄생을 알렸다. 이후 '정무문'(1972), '맹룡과강'(1972)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미국인들도 이소룡에게 열광했다.

1973년 영화 '용쟁호투'의 영어 제목은 'Enter the Dragon'. 홍콩영화사 골든하베스트가 제작하고 미국 워너브러더스가 배급을 맡아 전 세계에서 90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린 영화.

알려진 대로, 그는 '사망유희'를 촬영 중이던 1973년 7월 홍콩에서 뇌출혈로 숨졌다. 불과 서른셋. 미완성 유작이 된 '사망유희'는 대역 배우를 세워 후반부를 찍었고 1978년 공개되었다.

홍콩 침사추이에는 '스타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조형물은 단연 이소룡 동상. 이 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사람들로 줄을 선다. 이소룡은 약 50년 전에 눈을 감았지만 그는 여전히 살아있는 전설이다.

2006년 미국무술협회 설문조사에서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액션배우' 1위에 이소룡이 뽑혔다. 그가 사망한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미국인들은 그를 기억하는 것이다. LA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도 '브루스 리'라는 명판이 있다.

일본의 한 TV는 이소룡의 근육만을 집중분석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도 있다. 복근과 광배근이 분석 대상이었다. 이소룡은 동양인의 보통 키(172㎝)였지만, 엄청난 노력으로 다져진 완벽한 근육으로 세계 남성을 사로잡았다.

이안 감독/ 사진=위키피디아
이안 감독/ 사진=위키피디아

내가 이소룡이라는 전설의 액션 스타를 다시 떠올린 것은 대만의 세계적 영화감독 이안(李安, 리안)으로 인해서다. 나는 오래전 이안 감독이 연출한 '음식남녀'(飮食男女)를 보고 그의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신문에 이소룡 전기영화를 찍는다는 그의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대만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 중인 이안 감독은 이소룡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이소룡은 완전한 미국인으로도, 완전한 중국인으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소룡은 중국 쿵푸를 세계에 소개한 동서양 사이의 다리이자 전투의 과학자였고, 무술과 액션 영화 모두에 혁명을 일으킨 상징적인 공연예술가였다. 135파운드의 체구에도 엄청난 힘을 소유했으며 지칠 줄 모르는 노력을 통해 불가능한 꿈을 현실로 만들었던 이 훌륭하고 독특하고 인간 이야기를 전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고 있었다."

이소룡 전기영화에서 이소룡 역은 이안 감독의 아들인 배우 메이슨 리가 맡는다고 한다.

애나 메이 웡/ 사진=위키피디아 
애나 메이 웡/ 사진=위키피디아 
최초의 중국계 미국 배우

'미국인으로도, 중국인으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이소룡'이라는 대목을 읽으면서 순간적으로 배우 '애나 메이 웡'(Anna May Wong·1905~1961)의 인생이 겹쳤다.  

웡의 이름 앞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여러 개 붙는다. 최초의 중국계 미국 영화배우. 최초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중국계 미국 여배우. 최초로 25센트짜리 미국 동전에 등장한 아시아계 미국 여성.  

웡은 1905년 LA 차이나타운 근처에서 중국 이민 3세로 태어난다. 중국 이름은 웡 리우 청(黃柳霜). 외조부모와 친조부모 모두 1850년대에 태평양을 건너온 타이산 중국계.

그가 태어난 집은 차이나타운과 두 블록 떨어진 곳. 멕시코계, 독일계, 일본계가 사는 동네였다. 처음엔 공립학교에 들어갔지만 인종적 괴롭힘에 견디다 못해 영어로 수업을 하는 기독교 계열의 중국 학교로 전학한다.

어린 시절 집 근처에 영화관이 생겼다. 극장에 한두 번 드나들다가 그만 영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소녀의 영화에 대한 열정은 특별했다. 점심값으로 극장표를 샀고, 툭하면 학교 수업에 빠지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소녀는 배우가 되기로 결심한다. 틈만 나면 영화사 주변을 맴돌았다. 스스로 'CCC'라는 예명까지 만들어 자신을 알렸다. Curious Chinese Child. 열한 살 때 중국식과 영어식 이름을 합친 이름을 얻는다. 애나 메이 웡(Anna May Wong).

드디어 꿈이 이뤄졌다. 1919년 열네 살 때 아버지 모르게 영화 '홍등'(Red Lantern)에 엑스트라로 출연한 것이다. 한 마디 대사도 없는 랜턴을 옮기는 소녀. 그러다 보니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지도 않았다.

비록 이름 없는 엑스트라에 불과했지만 웡은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2년간 여러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1921년 학교 수업과 영화 출연을 병행하는 게 힘들어지자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기로 한다. 그해 웡은 처음으로 엔딩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가는 단역 배우가 된다. 마침내, 배우가 되었다.

두 번째 영화가 1924년작 '바그다드의 도둑'. 이 영화로 스타덤에 오른다. 동시에 패션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웡은 1920~1930년대 미국 최고의 패션 아이콘 중 한 명이었다. 1934년 뉴욕패션협회에 의해 '세계에서 가장 옷을 잘 입는 여성'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헐리우드는 웡에게 비중 있는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하기 싫은 배역이 계속 주어졌다. 이런 상황을 참다못해 1928년 웡은 영국으로 간다. '피카디리'(1929)에서 처음으로 주인공을 따낸다. 이후 영국 영화에서 잇따라 타이틀 롤을 맡는다. '용의 딸'(1931), '자바 헤드'(1934), '상하이의 딸'(1937). 드물게 미국에서도 영화를 찍었다. 마를렌 디트리히가 주연으로 나온 '상하이 특급열차'(1932)에서 조연을 맡았다. 
 
애나 메이 웡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진 25센트 동전/ 사진=위키피디아 
애나 메이 웡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진 25센트 동전/ 사진=위키피디아 
1935년, 그의 배우 인생에서 가장 잔인한 일이 벌어졌다. MGM 영화사가 펄 벅의 소설 '대지'를 영화로 만들기로 한다. 웡은 주인공인 중국 여성 오란 역(役)이 자신에게 돌아올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MGM은 웡이 아닌 루이스 라이너를 캐스팅했다. 루이스 라이너는 독일·영국계 미국 배우였다. 얼핏 생김새가 동양인과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라이너에게 '오란' 역이 돌아갔던 것이다. 가족 배경을 포함, 모든 면에서 최적의 배우는 웡뿐이었지만 그는 탈락했다. 할리우드에 만연한 인종차별의 결과였다. 웡이 '오란'을 연기했다면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웡이 받았으리라.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그는 중국을 지원하는데 돈과 시간을 쏟아부었다. 이어 벌어진 2차세계대전 기간에 할리우드는 영화를 거의 제작하지 않았다.

웡이 미국에서 첫 주인공이 된 것은 1951년 TV 미니시리즈 '리우 청 부인의 갤러리'에서다. 아시아계 미국 배우가 주연으로 나온 최초의 TV 시리즈. 10부작 드라마는 커다란 인기를 몰고 왔다. 하지만 1961년 뮤지컬 영화로 복귀를 준비하던 중 웡은 심장마비로 숨졌다. 불과 55세.

'최초'는 선각자에게 붙는 타이틀이다. 선각자는 뱃머리에서 홀로 폭풍우를 맞는 사람이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사람이 '최초'다. 이소룡은 웡이 세상을 뜨고 나서 할리우드에 데뷔했다. 이소룡 역시 보이지 않는 차별의 장벽 앞에서 홍콩을 통하는 우회로(迂廻路)를 선택했다. 그 모질고 기나긴 여정 끝에서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이 돌아갔다.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동전에 얼굴이 새겨진 애나 메이 웡. 그의 초상이 새겨진 25센트 동전은 2025년까지 발행된다.


author@naver.com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