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 분쟁의 기원 英 '밸푸어 선언' 100주년

英,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민족국가 수립 지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초석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인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당시 영국 내 유대인 지도자인 라이어널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서한. ⓒ AFP=뉴스1

(서울=뉴스1) 최종일 기자 =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발표된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 이스라엘 건국의 초석을 닦았지만 동시에 현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밸푸어 선언은 1차 세계 대전 종전 1년 전인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인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영국계 유대인 지도자인 라이어널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서한에 담겨있다.

밸푸어 장관은 당시 서한에서 영국은 적국 오스만투르크의 영토였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본거지(national home)' 건설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아랍 세계는 충격을 받았다. 2년 전 영국이 아랍의 정치 지도자 알리 빈 후세인에게 팔레스타인에 아랍 국가를 세우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맥마흔 선언'과 배치됐기 때문이다.

영국은 밸푸어 선언을 통해 전쟁에서 유대인들의 지원을 받으려고 했다. 당시 시온주의(Zionism,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설 운동)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온주의 운동

시온주의 바람은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일기 시작했다. 1897년 8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시온주의자 첫 총회에선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국가 건립 목표가 발표됐다.

당시 러시아와 동유럽에서 반유대인 정서가 확산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의 유입은 확산됐다. 유대인 인구는 1882년 2만4000에서 1895년엔 4만7000명으로 늘었다.

아랍권은 시온주의자들에 반발했고, 이들에 맞설 조직은 1911년 처음 발족됐다.

1916년엔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프랑수와 조르주 피코는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영토였던 현재 레바논과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 땅을 분할한다는 협정을 비밀리에 체결했다.

1차 대전 말 영국군 총사령과 에드문드 알렌비(왼쪽)와 아서 제임스 밸푸어 전 영국 외무장관(가운데), 허버트 사무엘 팔레스타인 1등 판무관. 1925년 촬영됐다. ⓒ AFP=뉴스1

팔레스타인은 국제적 관리가 예상됐지만 영국은 이것이 자국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유대인 국가 건립이 중동에서 영국의 거점을 보장할 것으로 보고, 시온주의를 이용하기로 했다.

1917년 밸푸어 외무장관은 내각의 승인을 받아 로스차일드에게 서한을 보냈다. 밸푸어 선언은 런던의 시온주의 지도자였던 카임 바이츠만의 승리였고, 그는 이후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아랍 세계는 중차대한 문제를 논의하지 못했고, 관련 내용을 통보받지도 못했다는 점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인구의 7%에 불과했다. 1920년 2월에 아랍권 시위가 처음 벌어졌다.

◇이스라엘 건국

밸푸어 선언은 1920년 4월 산레모 협정에서 실행에 옮겨진다. 이 회의에서 프랑스가 시리아와 레바논을, 영국은 이라크와 팔레스타인을 각각 위임 통치한다는 지역 분할 통치안을 확정했다.

이것은 1922년 4월 24일 국제연맹 이사회의 승인을 받게 되고 영국과 프랑스에 의한 아랍 분할 통치가 실시됐다.

산레모 협정으로 통일 아랍 국가의 건설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1936~1939년 팔레스타인에선 영국을 상대로 아랍인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영국은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아울러 2차 대전 중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로 인해 유대인 유입이 급증했다.

1947년 11월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 안을 채택했다. 성도인 예루살렘은 국제 통치를 받도록 하고, 팔레스타인은 나눴다.

1948년 5월 14일 영국의 위임 통치가 끝나자마자, 유대인 지도자 데이비드 벤 구리온은 이스라엘 국가 건립을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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