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터닝포인트]변화하는 세계 질서를 민주주의가 따라잡을 수 있을까?
나는 태국 정계에서 축출됐다. 다음 글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현주소에 대해 내가 깨달은 사실이다.
2024년, 나는 강제로 정계에서 은퇴해야 했다. 나이가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고작 43세였고, 전도유망한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능력이 부족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당시 나는 태국의 전진당(Move Forward Party)을 이끌고 2023년 총선에서 승리한 직후였다. 기록적인 75.2%의 투표율 속에서 거의 4,000만 표 중 1,400만 표 이상을 얻었다. 이 성과만 놓고 보면, 나는 차기 총리에 앉아야 마땅했다.
하지만 2024년 8월 7일 태국 헌법재판소는 전진당에 해산을 명령했다. 군부 정권이 직간접적으로 임명한 재판관들은 나에게도 10년 동안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처분을 내렸다.
그렇게 나는 순식간에 총리 후보에서 축출된 국회의원으로 전락했다. 유권자의 뜻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민주주의를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들에 의해 내게 부여되었던 민주적 위임은 폐기됐다.
낙담한 나는 하버드 케네디 스쿨로 돌아왔다. 한때 나의 집이었던 곳이다. 하지만 이번에 나는 야심차고 눈이 반짝이는 대학원생이 아니었다. 노련하고 상처 입은 연구원 신분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조국에서 자격을 박탈당한 후, 나는 외국에서 다시 자격을 얻었다. 권위주의 정부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새로운 술책들을 연구하고, 급변하는 세상을 이끌 차세대 리더들을 교육하는 데 몰두하게 된 것이었다.
학계로 복귀하자 오랫동안 느껴왔던 사실이 더 가까이에서 보였다. 민주주의가 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방글라데시, 베네수엘라, 미얀마, 홍콩, 튀니지, 한국, 미국 등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온 개혁가, 정책 입안자,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 각자의 역사는 달랐지만, 우리가 얻는 교훈은 똑같았다.
민주주의는 결코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끊임없는 경계가 필요하며, 민주주의의 안전장치는 대다수 시민이 깨닫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2024년 11월, 나는 케네디 스쿨 학생들과 함께 역사적인 개표방송을 지켜봤다. 나는 2008년에도 이곳에 있었다. 당시 나는 젊은 흑인 상원의원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민주 시대의 여명이 밝아온다고 확신했었다.
16년 후, 나는 같은 방에 있었다. 이번에는 힘겨운 선거 운동의 상처를 지닌 전직 총리 후보로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재선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장소는 변하지 않았지만, 정치 지형과 나의 개인적 상황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날 밤 시작된 것은 단순히 미국 정치의 새로운 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맹이 바뀌고, 글로벌 규범이 변형되며, 지난 세기 동안 국제사회를 형성했던 확실성들이 더 이상 당연하게 여겨질 수 없는 새로운 세계 질서의 개막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지정학적 위험 지역이 불타오르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은 동맹 관계를 재편하고 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태국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캄보디아-태국 분쟁은 10여 년 만에 가장 불안정한 지점에 이르렀다. 이는 이 지역에서도, 다른 모든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안정성이 갑자기 산산조각 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2026년,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아세안)은 매우 긴장된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다. 미국과 중국 간의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해묵은 문제들이 여전히 곪아 터지는 한편, 새로운 도전들이 놀라운 속도로 나타나고 있다.
두 강대국 모두 동남아시아를 자신들의 경쟁적인 영향권으로 끌어들일 수단과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로 인해 아세안이 스스로의 운명을 이끄는 주체가 되기보다 외부의 의제를 지닌 강대국들의 경쟁 무대가 될 위험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중립성’이라는 동남아시아의 전통, 즉 어느 한쪽 편을 들지 않거나 무관심을 보이는 외교적 태도는 이제 통하지 않을 수 있다. 중립성을 수동적인 방패로 여기는 국가들은 주요 강대국들에 의해 그 방패가 빠르게 뚫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대신, 중립성이 능동적인 추구일 때, 우리는 자율성을 포기하지 않고 여러 방향의 압력 속에서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을 얻는다.
의도적인 전략적 기술로서 중립성을 실천하는 국가들은 주권을 포기하지 않고 양보를 얻어낸다. 또한, 주도권을 잃지 않고 비대칭적인 관계의 균형을 맞추며, 원치 않는 타협을 피할 가능성이 더 높다.
강대국 간의 경쟁이 심화되는 오늘날의 시대에, 나는 이 기술이 국가적 차원을 넘어 집단적 차원으로 확대돼야 한다고 믿는다. 아세안이 응집력 있는 블록으로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그 중립성이 진정한 교섭력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반대로 회원국들이 고립되고 취약한 국가들로 분열되게 만들지를 결정할 것이다.
외교 정책은 국내 정치의 거울이다. 동남아시아의 투표와 헌법은 군부와 정치 세습 가문들의 복잡한 거미줄로 겹겹이 쌓여 있다. 나의 정치 여정이 무언가를 보여줬다면, 그것은 우리 지역이 개혁의 선구자보다는 권력의 상속자들에 의해 이끌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이 세습 가문들은 그들의 가문을 보존할지 모르지만, 민첩성을 요구하는 세상에서 아세안을 취약하게 만들었다. 나의 희망은 차세대 리더들이 앞에 놓인 도전들에 맞서 싸우거나, 아니면 물러나 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기다릴 수 없다.
나는 특권이 아니라 목표로 뭉친 아세안 전역의 차세대 리더들이 함께 일어서는 미래를 그린다. 그들의 과제는 우리 지역의 약속을 되살리는 것이다. 즉, 다양성을 힘으로, 위기를 경쟁력으로, 열망을 구체적인 발전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이 목소리들을 키우고 그들에게 리더십을 발휘할 길을 열어줄 수 있다면, 아세안은 세습과 분열의 무게를 넘어 세계에서 회복력 있고 단결된 힘으로서 진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 위 내용은 뉴욕타임스(NYT)가 발간하는 새해 전망서 '터닝 포인트 어젠다 2026(이하 '터닝 포인트')'에 수록된 기사다. 다채로운 콘텐츠로 격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혜안을 제공하는 '터닝 포인트'는 서점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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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터닝 포인트: 2025년 1월, 도널드 트럼프가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며 세계를 뒤흔들고, 반민주주의 지도자들에게 힘을 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