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일의 맥] 우당탕 축구가 싫다면 논두렁부터 잔디로 바꾸자

울리 슈틸리케 대표팀 감독은 한국 경기장의 질 떨어지는 잔디 상태를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 News1
울리 슈틸리케 대표팀 감독은 한국 경기장의 질 떨어지는 잔디 상태를 지속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 News1

(서울=뉴스1) 임성일 기자 = 지난 11월15일 우즈베키스탄과의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5차전이 끝난 뒤 2-1 역전승을 견인한 결승골의 주인공 구자철은 "분위기 전환에 성공했다"고 기쁨을 표하면서도 한편으로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는 "홈에서 열리는 경기인데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피치에서 뛰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며 질 떨어지는 그라운드 사정에 대해 씁쓸함을 표했다.

선수가 경기를 마치고 잔디 상태를 언급하는 것이 전혀 낯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여느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주로 환경이 좋지 않은 곳에서의 악전고투 후 들리던 푸념이 안방에서, 그것도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디움인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의 경기 후 나왔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당시 구자철은 "전반전을 마치고 하프타임 때 감독님이 후반에는 중원으로 내려가 롱볼보다는 짧은 패스로 경기를 풀어가라는 전술적 지시를 내리셨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퍼스트 터치가 제대로 되기 힘들 정도로 잔디가 좋지 않은" 경기장에서 난감한 지시를 받아 고생했던 구자철은 작심한 듯 현실을 지적했다.

그는 "홈에서 상대를 강하게 누르는 경기를 하면서도 (경기장 상태가 나빠)실수가 나온다. 개인적으로 이런 것(잔디 상태)은 기본이라고 생각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전북은 결승 1차전(11월19일)을 약 한 달 앞둔 10월20일 AFC로부터 공문을 받았다. 전주월드컵경기장 잔디 문제가 개선되지 않으면 개최 장소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경고문이었다. 부랴부랴 잔디를 뒤집고 새 것으로 갈아 결승전을 치르기는 했으나 '눈 가리고 아웅' 수준이었다. 자신들도 피해를 봤다.

잔디 교체 후 치른 11월6일 전북과 FC서울의 K리그 클래식 최종전에서 선수들의 넘어지는 장면이 자주 나왔던 것은 잔디가 미처 뿌리를 내리지 못해 소위 '떠 있었던' 까닭이다. 때문에 잔디가 움푹 패거나, 스터드가 박혀 빠지지 않거나, 균형을 잡아주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일이 쉽게 발생했다. 전북 선수들은 자신들의 홈 구장임에도 마치 남의 집에서 뛰는 듯한 어려움을 겪었다.

사실 국내 경기장 잔디 상태에 대한 지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시즌이 다 끝난 시점에 이 문제를 다시 꺼낸 것은, 바로 이웃나라 일본에서 펼쳐진 FIFA 클럽월드컵에서 발휘된 전북현대 선수들의 경쾌한 축구를 보았기 때문이다. 조건이 되면 우리도 그런 축구가 가능했다.

클럽월드컵에 참가한 전북현대 선수들은 잘 정비된 잔디 위에서 인상적인 조직력 축구를 보여줬다. (전북현대 제공) ⓒ News1

ACL 우승팀 자격으로 대회에 참가한 전북은 11일 열린 클럽 아메리카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고도 1-2로 역전패를 당해 4강 진출에 실패했다. 비록 졌으나 경기력은 대등하거나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운영이 아쉬웠을 뿐이다. 그 아쉬움은 14일 열린 마멜로디 선다운스(남아공)와의 5-6위 결정전에서 4-1 대승을 거두면서 털어버렸다.

아프리카 챔피언과의 대결에서 전북은 세계적인 클럽들의 유기적인 플레이를 연상시킬 정도의 짜임새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특히 김보경과 이재성을 중심으로 한 미드필더진의 패스워크는 마치 훈련 때나 가능한 현란한 호흡이 나왔다. 표정에서 '재밌다'는 게 읽혔을 정도로 선수들은 즐기고 있었다. 손으로 던지듯 패스가 연결되자 마멜로디 선수들은 발만 동동 굴렀다.

대회를 마치고 돌아온 전북의 미드필더 이재성은 "아무래도 부담이 덜한 대회라 즐길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잔디가 워낙 좋으니까 축구가 재밌더라"면서 "솔직히 마멜로디전 같은 경기는 1년 내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마치 축구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고 했다. 이어 "솔직히 한국 축구도 이런 부분의 발전이 필요하다고 본다. 선수들이 즐겁게 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면 기술적인 발전도 이뤄질 것이라 생각한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축구 선수가, 그것도 대표급 선수들이 좋은 잔디에서 뛰고 싶다고 하소연을 할 만큼 환경이 열악한 것은 아니다. FIFA 월드컵을 치른 나라이고, 내년에 U-20 월드컵을 또 개최하는 국가다. 어지간한 인프라는 대부분의 나라들이 부러워할 수준이다. 적어도 겉으로 봤을 때는 그렇다. 하지만 외형과 달리 내실은 부실하다.

잔디를 비롯, K리그 경기장 관리는 대부분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시설관리공단이 책임지고 있다. 이에 각 구단들은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며 울상이고 관리공단 쪽은 매일 경기가 열리는 것도 아닌 축구장의 잔디 돌보기가 귀찮은 일거리다. 담당 공무원에게 무조건 사명감을 바라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해결책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각 구단이 시설관리공단과 논의해 경기장 잔디를 포함한 시설 관리만 떼어내 외주 업체를 선정, 자신들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시나리오를 세우고 타진했던 구단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한 K리그 클래식 구단의 홈경기 운영 담당자는 "정확한 금액을 계산해보지는 않았으나 구단이 부담해야할 비용이 상당하다. 경기장을 여타 수익사업 없이 축구 용도로만 사용하기 위해 지자체에 건넬 금액과 아웃소싱 업체에게 지불해야할 관리비 등을 대략적으로 뽑아도 15억원은 넘어갈 것"이라면서 "모든 팀들이 운영비를 줄이라는 지시를 받고 있는데 그런 와중 새롭게 지출이 생기는 사업을 확장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기는 하다"고 토로했다.

쉽진 않다. 그렇다고 모든 구성원이 우는소리 시리즈만 내놓다 그냥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비생산적인 일이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개선될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과 의지라는 첫 스텝이 필요하다. 실마리는 항상 상식선에서 나온다. 목마르다면 우물을 파야한다.

대표선수들이 홈 경기보다 원정경기를 편하게 여긴다면 문제가 있다.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모든 구성원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News1

지자체에서 연고지에 있는 축구단의 쓸모를 높게 판단한다면 잔디 유지를 포함한 경기장 관리에 보다 신경을 쓸 수 있다. 기본적으로 지자체의 투자를 유도하는 것은 각 구단의 몫이다. 성적이든 설득이든 알아서 할 일이다. 실제로 인식 변화를 꾀한 구단도 있다. 전라북도와 전주에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는 전북현대 축구단을 향해 전주시장과 전북 도지사가 이전과 다른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축구 수도'를 자처하는 수원시 역시 수원삼성과 수원FC를 바라보는 시선이 여느 도시와는 다르다. 물론 중소클럽은 이마저도 어렵다.

각 구단의 힘으로 한계가 있다면 프로축구연맹 나아가 대한축구협회의 지원사격이 필요하다. 특히 축구협회는, 'K리그의 문제'라고 등 돌릴 게 아니다. 사실 대표팀의 문제이기도 하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경기장을 누가 선정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경기력만 고려하고 장소를 택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면서 "대표팀 뿐 아니라 K리그 팀들이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상당히 아쉽다"는 말을 할 정도라면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선수들 뿐만이 아니라 경기장도 준비가 안됐다면 A매치 출전 기회를 주지 말아야한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에게 추구하는 축구가 무엇이냐 물어보면 △미드필더 운영을 중시하고 △롱패스보다는 짧은 패스를 선호하며 △공수전환이 빠른 속도감 있는 축구 등은 기본적으로 포함될 내용이다. 모두 그라운드 환경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할 일이다.

머리로는 이상을 말하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논두렁이라면 행하는 이들이나 보는 이들 모두 '우당탕 축구'를 감내해야한다. 세계로의 도약을 노리는 나라의 국가대표선수가 '제발 잔디 좀!'이라고 외친다면 정말 문제가 있다. 월드컵 2번 3번 개최한다고 축구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잔디가 깔렸다고 다 잔디 구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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