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야구, 야구인] 최동원-김시진의 사상 최대 트레이드를 기억하며
- 이창호 기자
(뉴스1스포츠) 이창호 기자 = 1988년 11월22일. ‘1’과 ‘2’와 ‘8’이 나란히 붙어 있는 화요일이었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사상 최대의 트레이드를 승인한 날이다.
롯데와 삼성이 1988년 11월21일 사상 최대의 트레이드를 공식 발표했다. 프랜차이즈 스타인 에이스를 맞바꾸기로 합의했다. 롯데는 최동원, 삼성은 김시진을 내놓았다. 58년 개띠 동갑내기로서 각각 경남고, 대구상고 시절부터 초고교급이라는 평가와 함께 한국 야구를 이끌었던 최고 투수를 트레이드의 카드로 활용하리라 예상한 야구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롯데는 최동원에다 정통파 오버핸드 투수 오명록과 포수 김성현, 삼성은 김시진에다 사이드암 투수 전용권과 내야수 오대석, 외야수 허규옥을 묶은 ‘3대4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슈퍼스타’ 최동원과 김시진은 깜짝 놀랐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탓이었다.
롯데가 지난 2일 kt와 ‘5대4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10년 보증수표’라던 포수 장성우를 중심으로 투수 최대성과 포수 윤여운, 외야수 하준호와 이창진을 내주면서 즉시 전력으로 투입할 수 있는 투수와 미래를 위해 젊은 선수들을 영입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투수 박세웅, 조현우, 이성민과 포수 안중열을 데려왔다.
트레이드의 득실에 대해 이런 말 저런 말이 나오기 마련이다. 평가는 이르다.
5월5일, 어린이날. kt에서 롯데 유니폼으로 갈아 입은 박세웅이 SK와의 홈 경기에 첫 선을 보였다. 이종운 롯데 감독은 4-10으로 뒤진 9회초 사직구장 마운드에 올렸다. 부담을 갖지 말고 홈 팬들 앞에서 마음껏 던져 보라는 배려였다.
그러나 막 스무살이 된 박세웅은 긴장했다. 자신의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했다. 첫 타자인 1번 박재상에서 몸에 맞는 공을 던지더니 2번 조동화에게 중전안타를 맞았다. 3번 최정에겐 볼넷. 무사 만루를 자초했다. 결국 4번 브라운을 병살타로 돌려세웠지만 1점을 더 내줬다. 0.2이닝 동안 19개의 공을 던져 1안타와 4사구 2개로 1실점했다.
이날 kt 유니폼을 입은 하준호는 대전 한화전에 선발 좌익수 겸 7번으로 나가 5타수 4안타 1타점으로 존재감을 확인시켰다. 시속 150km를 웃도는 강속구가 트레이드 마크인 최대성도 8회말 2사 2번 대타 강경학에게 6개의 빠른 공을 던져 우익수 플라이로 처리하면서 이적 신고를 끝냈다.
트레이드의 최우선 목표는 전력 보강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로 선수를 맞바꾸거나 현금을 받고 내주는 경우도 있다. 재정 상태가 넉넉지 못한 팀은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구단 운영비를 충당한다. 쌍방울이 막판 ‘선수 장사’를 했고, 태평양을 인수한 뒤 잘 나가던 현대도 모 그룹의 재정 악화로 어려움을 겪자 트레이드로 자구책을 마련하려고 했다.
현대를 인수한 우리 히어로즈의 지나친 현금 트레이드는 비난의 화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부자 구단’ 삼성과는 2년에 걸쳐 ‘빅딜’을 성사시켰다. 10승대 왼손 선발 투수가 절실했던 삼성은 2008년 11월14일 장원삼을 데려오는 조건으로 현금 30억원과 불펜 투수 박성훈을 트레이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나머지 구단들이 ‘히어로즈는 5년 동안 현금 트레이드와 구단 매각 금지를 합의해 놓고 장원삼의 현금 트레이드를 진행하는 것'은 위반이라며 거센 항의를 한 탓에 KBO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장원삼의 트레이드는 1년이 흐른 2009년 12월30일 현금 20억원과 투수 박성훈, 김상수를 묶는 조건으로 성사됐다.
삼성은 1988년 왜 김시진을 트레이드 카드로 내놓았을까. 롯데가 최동원을 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삼성은 한국시리즈 우승에 목말라 있었다. 삼성의 ‘제일주의’는 번번이 ‘작은 그룹’ 해태의 벽에 막혀 퇴색됐다. 자존심이 상했다. 어떻게 하든 해태를 꺾고 한국시리즈 챔피언이 되는 것이 지상 최대의 과제였다.
구단 체질 개선의 타깃으로 ‘새 가슴’ 김시진을 정했다. 페넌트레이스에선 김일융과 함께 원투 펀치로서 20승 이상도 기록했지만 ‘단기전에 약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결정적인 순간 정면 승부보다 피해가는 피칭, 도망가는 피칭을 하는 통에 스스로 위기를 자초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삼성은 상대를 찾아 나섰다. 롯데의 ‘강심장 투수’ 최동원이 표적이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올리면서 롯데의 사상 첫 챔피언 등극을 이끌어낸 최고의 배짱을 지닌 최동원이면 ‘타도 해태’가 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최동원과 김시진을 1대1로 맞바꾸는 것으론 균형이 맞지 않았다. 최동원을 내주는 롯데가 ‘손해’라는 느낌이 든 탓이었다. 상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양 쪽에서 한 명씩 필요한 선수를 붙었다. 잠수함 투수에게 약했던 롯데는 전용권을 요구했고, 삼성은 김시진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선발 후보로 오명록을 지목했다.
그래도 합의는 쉽지 않았다. 롯데는 유격수와 3루수가 가능한 오대석, 왼손 외야수 허규옥으로 공수를 보강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삼성은 김성래, 김용국, 류중일 등 젊은 내야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만수의 백업 요원이 필요했다. 그래서 포수 김성현을 요구했다.
결국 롯데는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을 내놓았고 삼성은 김시진, 전용권, 오대석, 허규옥을 묶어 전격적인 3대4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최동원은 ‘미운 털’이 박혀 있었다. 성기영 감독 체제로 끌고 간 1988년 시즌 막판 한창 포스트시즌 진출 경쟁을 하고 있을 때 부상을 이유로 선발 로테이션을 걸렀다. 또 시즌이 끝나자마자 ‘선수회 결성’을 주도했다. 최동원이 중심이 돼 처음으로 유성에 모인 각 구단의 대표들은 원칙적으로 선수회 출범에 합의했다. 회칙과 회비 징수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고, 2차 모임에서 공식 출범을 알리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각 구단에는 ‘비상’이 걸렸다. 단장들이 직접 나서 ‘유성 모임’에 참석했던 선수들을 면담했다. ‘왜 선수회를 결정하면 안 되는지’ 를 회유했고, ‘선수회를 출범시키면 구단을 해체하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각 구단의 선수 대표들은 계룡산에서 열기로 했던 2차 모임을 갖지 못했다. 사전 정보를 입수한 구단들이 소속 선수들의 참석을 적극 저지하는 바람에 모임 자체가 물거품이 됐다.
1988년 ‘한국프로야구 선수회’ 설립은 무산됐다. 후폭풍의 시작이 바로 최동원-김시진의 트레이드였다. 삼성과 롯데는 최고 투수들의 맞교환이 이루어진지 채 한 달도 지나지 않는 1988년 12월20일 또 하나의 대형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삼성은 ‘타격 천재’ 장효조에다 왼손 투수 장태수를 묶고 롯데는 타선의 주축이었던 김용철에다 왼손 투수 이문한을 맞춰 2대2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김용철은 최동원과 함께 롯데 선수단에서 ‘선수회 설립’에 적극적인 지지와 행동을 보였던 고참 선수였다.
이젠 삼성과 롯데가 단행한 ‘빅딜’의 주인공 중 두 명의 스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장효조와 최동원은 야구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고 떠났다.
김시진은 가족과 함께 트레이드라는 현실을 받아들인 채 부산으로 이사했지만 최동원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트레이드를 인정할 수 없다. 보복성 트레이드”라며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러나 최동원-김시진 트레이드가 단행된 지 27년이 흐른 지금도 선수에겐 트레이드 거부권이 없다. 트레이드를 거부하면 임의탈퇴선수가 되고, 결국 프로 선수로서 뛰지 못한다.
최동원과 김시진은 둘 다 고향을 떠나 빛을 내지 못했다. 서른 살에 팀을 옮겼으니 충분히 더 활약할 수 있었건만 선수로서의 마지막은 초라했다. 변변한 은퇴식도 없이 현역 유니폼을 벗었다.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는 올해로 33년째를 맞고 있다. 트레이드에 대한 개념도, 트레이드를 받아들이는 선수들의 생각도 엄청 변했다. 세월의 흐름만큼 성숙해졌다.
야구 팬들은 부산에다 새 둥지를 튼 ‘약관’의 박세웅부터 정든 고향을 떠나 수원이란 낯선 곳에서 스타의 꿈을 키워야 하는 장성우까지 언제나 박수 받는 선수로 기억되길 바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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