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돌봄 공백 속 '경계선지능인' 가둔 가스라이팅의 굴레
[경계선의 집]④낮은 자존감과 학습된 무기력에 약점 잡혀
'돌봄 공백' 파고든 미신고 시설, 착취 구조의 온상으로
- 권진영 기자, 신윤하 기자, 권준언 기자
(서울=뉴스1) 권진영 신윤하 권준언 기자
가족들이 (돈을) 안 빌려주는 게 (네가) 사고를 많이 쳐서 그런 거 아니야? 그렇지?
경계선지능인 지원단체 및 대안가정을 운영하던 전 대표 A 씨의 발언이다. 그는 대안가정에서 장애인활동지원사로 거주하며 일한 정가람 씨(가명·20대)에게 그동안 실수로 인해 발생한 금전적 손해 책임을 물으며 이렇게 말했다.
A 씨는 약 24분간 취조를 이어갔다. 그는 정 씨에게 "문도 파손이 있었나요? 없었나요? 그로 인한 재물 손괴가 발생했죠?", "도주 우려, 그리고 그 이후에 한 번이라도 보상한 부분이 없었다는 것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적용됩니다"라며 마치 수사 기관처럼 따졌다.
정 씨는 "보상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전달 드리면 될지"라며 적극적인 피해 복구 의지를 나타냈다. 하지만 A 씨는 "모르겠다. 더 이상 내가 조언 해주고 싶지 않은데 본인이 알아서 해야지"라며 발을 뺐다. 애초에 실질적 보상과 문제 해결은 이 대화의 주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A 씨는 정 씨를 "머저리"라고 부르는 등 평소에도 폭언과 가스라이팅 소지가 있는 발언을 일삼았다.([단독] 경계선지능인에 꽂힌 폭언·노동착취…'아빠 자처' 사회복지사의 이면)
정 씨와 같은 경계선지능인은 법률상 장애인으로 인정되지 않지만 일상 판단이나 의사결정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의사결정이 쉽지 않은 만큼 실수도, 실패도 일반인들보다 더 많이 경험한다. 이는 곧 자신감, 자존감 저하로 이어지는데, 전문가들은 경계선지능인의 일상화된 무기력이 가스라이팅에 악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홍세영 느린학습자시민회 이사는 "경계선지능인은 자신이 주장이 수용된 경험이 (상대적으로) 없다 보니 가스라이팅을 당하기 쉽다"며 "스스로 경험치를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없으면 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조한진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들은 늘 실패의 경험을 해 왔다. 주위의 눈치와 비난에 위축되다가 누가 조금만 따뜻한 말을 하면 속아 넘어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무기력이 학습화돼 있기 때문에 차별을 차별로 인식하지 못한다. 인식해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니 참고 지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 씨가 A 씨의 대안가정에 발을 들인 계기도 '따뜻한 말' 한마디였다. 전부터 관심이 있던 사회복지 계열 대학 진학을 도와줄 수 있다는 제안에 혹한 것이다. 하지만 정 씨는 "정작 1년 반 동안 있으면서 한 번도 원서 접수를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A 씨는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여기(대안가정)는 자기가 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사람들만 올 수 있다"며 "의사 표현을 못 하는 사람은 장애인 거주시설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논리로 "해당 가정에 장애인이 거주하지 않고 있다"며 지자체의 시설 전환 안내도 거부했다. 사실상 미신고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단독]'홍두깨폭행 의혹' 장애인 대안가정, 알고보니 미신 시설)
하지만 조 교수는 이런 A 씨의 주장이 "논리적이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는 "경계선지능인은 자폐·발달장애와 크게 다르지 않다"며 "인지·판단 능력과 자기 결정권이 떨어지는데 경계선지능인이라 자기 결정권을 발휘해 (대안가정에) 왔다는 것은 말장난"이라고 꼬집었다.
경계선지능인의 구분은 지능지수(IQ)에 따라 결정된다. 통상적으로 71~84구간에 해당하며 70 이하는 지적장애인으로 인정된다. 1~2점 차이로 법적 장애인 지위가 갈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성연 제주특별자치도 장애인권익옹호기관장은 "경계선지능인도 장애 관련 범죄에서 인권침해 우려가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지난 7월 '경계선지능인 자립지원 및 권리보장에 관한 법률안'(서미화 의원 등 13인)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경계선지능인을 '발달장애인에 해당하지 아니하지만, 인지능력 등의 부족으로 학습 및 사회생활 적응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으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정의한다는 것이 골자다. 장애인 인정 여부를 떠나 권리보장과 자립을 위해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를 중심으로 뒀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하지만 해당 법안은 각종 정쟁 사안에 밀려 3개월째 계류 중이다.
제도의 공백이 지속되는 가운데 A 씨의 대안가정과 같은 미신고 시설에서의 학대와 착취를 막기 위해서는 경계선지능인을 위한 보호 체계를 재점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는 "본질적 문제는 돌봄 공백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돌봄에 지친 일부 보호자들이 "수급비를 안 받아도 되니 맡아달라"라며 부탁하는 수요가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렇게 해서 경계선지능인을 비롯한 발달장애인을 모은 미신고시설은 후원금 장사로 소위 '돈맛'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김 변호사는 "그중에서도 (경계선지능인처럼 상대적으로) 기능이 좋은 이들을 장애인의 중간관리자로 두고 착취 구조를 형성해 사육하는 상황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그 구조가 수십년간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제대로 된 숙소도 아닌 곳에 몰아넣고 그루밍, 성 착취를 하는데도 (사회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여기에 밀려드는 사람들의 보호 체계가 취약하기 때문"이라며 "그런 것을 넘어서지 못하면 미신고 시설 이슈는 해결될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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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경계선의 집] 경계선지능인과 지적장애인, 그리고 이들의 '아빠'를 자처하던 사람이 함께 살던 대안가정. 아빠는 경계선지능 장애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들들이 아빠로부터 탈출했다. 아들들은 폭행과 원치 않는 신체 접촉, 노동 착취를 당했다고 했다. 그 집에선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뉴스1>은 피해를 입었다는 '아들들'과, 억울하다는 '아빠'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