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롭힘·성희롱 피해자에 비밀유지서약 강요…왜 거부 못할까
피해 사실 확인돼도 '법에 의무 없다'며 조치 결과 미통보
- 강서연 기자
(서울=뉴스1) 강서연 기자 = 한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 중인 백 모 씨는 한국·일본지사에서 근무하던 중 일본지사 소속 A 씨로부터 성희롱과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
백 씨가 본사에 피해 사실을 신고했으나, 회사는 조사 전 '논의된 정보를 외부에 공개할 경우 최대 해고에 이를 수 있다'는 내용의 비밀유지 각서에 동의를 요구했다.
이후 피해 사실이 인정됐음에도 회사는 가해자 징계 수위 등 조치 내용을 백 씨에게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이에 백 씨가 노동청에 진정했지만, 노동청은 '행위자의 징계 내용 및 강도에 대한 피해근로자의 알권리를 관련법상 특정한 바 없다'는 이유로 사건을 종결했다.
21일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회사가 직장 내 성희롱·괴롭힘 등을 감추고 넘어가기 위해 피해자에게 비밀유지서약서를 요구할 때 대부분의 직장인이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회사로부터 '거부 시 조사가 불가능하다'는 안내를 받고 결국 비밀유지서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행법은 직장 내 괴롭힘·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조사한 사람, 조사 내용을 보고받은 사람 및 그 밖에 조사 과정에 참여한 사람이 해당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피해 근로자 등의 의사에 반하여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는 조사 과정에서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사건이 불필요하게 유출되면서 발생할 수 있는 2차 피해를 예방할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일부 사용자들은 해당 조항을 근거로 피해자들에게 비밀유지서약서 서명을 강요하고, 동의하지 않으면 신고 접수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법의 취지를 훼손하고 있다.
근로기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은 사용자가 신고를 접수하거나 직장 내 괴롭힘·성희롱 발생 사실을 인지한 경우 '지체없이 당사자 등을 대상으로 그 사실 확인을 위해 객관적으로 조사를 실시'할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는 피해자의 비밀유지서약 동의 여부나 내부 규정에 의해 선택적으로 발생하는 의무가 아닌, 법률 그 자체에 명시된 강행적 의무다.
즉, 비밀유지서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건 접수를 거부하고 조사를 실시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법 위반이다.
이들은 또 피해자의 입을 틀어막는 것 못지않게 피해 당사자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것도 고질적 문제라고 비판했다.
직장갑질119는 "피해자에게 비밀유지서약 동의를 강요하거나, 동의 거부 시 조사 자체를 진행하지 않는 상식 밖 사용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감독이 필요하다"고 했다.
강은희 직장갑질119 변호사는 "괴롭힘, 성희롱 사건에 대한 비밀유지서약서는 근로자의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것으로서 법원에서 그 효력이 부정될 수 있다"며 "특히 서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조사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것은 위법행위"라고 밝혔다.
강 변호사는 "조사 이후 행위자에 대한 조치 결과를 피해자와 공유하지 않는 것은 법에서 요구하는 피해자 보호조치가 실질적으로 이행될 수 없게 만든다"며 "피해자 보호의 전제로써 행위자에 대한 조치 결과가 반드시 통보돼야 한다"고 말했다.
ksy@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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