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월요묵상] 평온하십니까? 불안하십니까?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뉴스1

(서울=뉴스1) 배철현 고전문헌학자 = 나는 '평안(平安)'이라는 말 보다는 '평온(平穩)'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비슷한 의미를 지녔지만, 그 뉘앙스 때문이다. 뉘앙스는 그 대상을 소중하게 여겨 있는 그대로 가만히 응시해야 드러나는 미세한 차이다. 베일에 가려져 선뜻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의미가 인내와 몰입이라는 통로를 거치면 그 차이를 드러낸다. 평안은 울퉁불퉁한 땅 바닥을 손과 기구로 다져 평평하게 만든 후, 그 시원하고 정돈된 정원을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관찰하는 여유다. 평안은 소용돌이치는 삶에 순간의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다시 비바람을 몰아치고 잡초는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로 높이 올라간 공이 운명적으로 정해진 최고점에 도달한 후, 되돌아보지 않고 하염없이 땅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올라간 것은 내려오기 마련이다. 구약성경 <전도서>에 등장한 문구들처럼,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심겨질 때가 있고 뽑힐 때가 있다. 얻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다. 이것이 지구와 그 안에 잠시 기생하는 동식물들이 복종해야하는 거대한 원칙이다.

평온은 의미가 심오하다. 정원 가꾸기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정원사가 정원을 관리하지 않아 무성하게 자라난 잡초와 너부러진 돌들을 평평하게 정리한 후, 이마에서 흘러내는 땀을 닦고, 그 순간에 마음으로 스며드는 조용한 기쁨이다. 그런 마음은 또한 추수할 때가 되어 농부의 낫을 기다리는 벼의 심정이기도 하다. 봄에 파종되어, 발아하고, 태양 광선의 구애를 받아 싹을 틔우고, 잎사귀를 지구가 회전하는 방향으로 하늘 높이 휘감아 올린 후, 생명을 지닌 존재들의 마땅한 표식을 낱알로 맺는다. 그 낱알은 더 이상, 고개를 높이 들지 않는다. 자신이 해야 할 유일하고도 거룩한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이다. 삼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에게 생명을 부여한 농부의 추수를 기다린다. 한자 온(穩)에는 자신의 성과를 과시하려는 급한 마음(急)을, 자연의 이치 즉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신비(工)를 깨달은 벼(禾)가 고개를 숙이며 삼가는 심정(忄)이 담겨져 있다.

사막에 거주하며 자신의 이치를 오랫동안 관찰한 중동인들은 그런 마음을 '샬람'이란 개념으로 표현하였다. '샬람'이란 단어는 기원전 23세기 셈족어 언어인 아카드어에 처음 등장한다. 아카드어로 '샬람'(šalām)은 '온전·평온·회복·안전·번영'이란 뜻이다. 이 심리학적이며 철학적인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는, 이것이 지닌 구체적인 사회경제적 문맥에서 찾을 수 있다. '샬람'은 한 소작농이 왕로부터 농토를 빌려 농사를 지은 후, 그 소작의 일부를 정부에 되갚을 때 등장하는 용어다. '샬람'은 채무의 소멸이며 동시에 그 때 채무자가 느끼는 평온과 안도다.

'샬람'이란 아카드 단어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에게도 건너와 히브리어 '샬롬'(šālôm)이 되었고, 아랍인들에게는 '살람'(salām)이 되었다. 히브리어 '샬롬'이나 아랍어 '살람'은, 뒤돌아보면 순간인 인생을 사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반드시 그리고 운명적으로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그것을 어떤 역경이나 방해가 와도 굴하지 않고 완수할 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인 '평온'이다. 평온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조용히 자라나는 의연이다.

인간을 신적으로 만드는 궁극적인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가을의 추수를 기다리는 벼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하며 몰입하는 마음, '평온'이다. 평온에는 의심, 공포, 걱정, 근심, 슬픔이 존재하지 않는다. 평온한 인간은 지금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조용한 희열에 휩싸여있다. 매일 매일 외부에서 눈과 귀를 통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평온을 유지할 능력이 있다면, 그는 이미 극락과 천국을 지금-여기에서 구현한 자다. 삶이라는 예술작품의 궁극적인 성배는 '평온'이다.

이 능력을 가꾸고 신장시키는 훈련은 쉽지 않다. 곳곳에 평온을 흔들려는 적들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나와 부러움, 욕망, 식탐, 분노를 일으키는 잡담들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부여잡고 평온을 실천하는 것은 거의 신적인 경지다. 중심 자리를 타인에게 넘겨주면, 인간은 초라해져 주변으로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부정적인 감정들로 무장한다.

우리를 코로나 시대의 불행에서 구원할 가장 유용한 도움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의 도움이 아니다. 우리 각자가 어떤 상황에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평온한 마음이다. 노예였다가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는 <인생수첩>이라는 책 첫 구절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인생에는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들이 있고, 그렇지 않는 것들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조절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돈, 물질적 소유, 인간관계, 타인의 주장·의견·행동, 건강, 그리고 공동체와 사회의 수준과 상태 등이다. 우리 대부분은 '외적인 것들'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과 힘을 소진한다.

이런 외적인 것들이 우리 삶에 평안과 편리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다. 우리가 하고 싶은 일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성적인 인간은 건강보다는 병을, 부보다는 가난을, 자유보다는 억압을, 명성보다는 오명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이 외적인 것들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근본적인 삶의 방식이나 목적과 동일한 것으로 여긴다. 욕망하는 외적인 것들을 만족스럽게 얻지 못하면, 좌절하고 불안하고 우울의 늪에 빠진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것들을 획득하는 데 성공해도 그것들을 잃을까봐 안절부절 못하고, 그 만큼 더 커진 욕심으로 불만은 더 커진다.

삶의 예술인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이 있다. 이런 외적인 것들을 자기 삶의 주인자리에서 내몰아내는 일이다. 평온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길은 내가 조절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탈출시키는 자유다. 자유란 내가 외적인 것을 획득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지만, 그것을 모두 잃은 경우에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고 유지하는 마음 상태다. 평온은 깊은 묵상을 통해 내가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할 유일무이한 임무를 '의도적이며 섬세하게 선택'할 때 등장한다. 그 선택은 결과에 상관없이, 아니 과정을 결과로 변모시키는 평온의 시작이다. 신중한 사람은 인생이라는 경기장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시련과 어려움을 두려워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그는 그 불행을 행복으로 만들 든든한 마음, 평온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평온하십니까? 아니면 불안하십니까?

미국 풍경화가 조지 이니스(1825-1894)의 유화 '이탈리아 네미 화산 호수'(Lake Nemi), 보스톤 미술관.ⓒ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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