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추운 가을날, 불로 쉼터 잃은 이주민들은...

지구촌사랑나눔 이용 이주민들 '잠자리 걱정'
추워지자 연기 내음 참고 쉼터서 자겠다는 사람도
방화 용의자 정신이상 중국 동포는 12일 숨져

(서울=뉴스1) 박현우 기자 = 16일 오후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사)지구촌사랑나눔'을 다시 찾았다.

지구촌사랑나눔은 몸이 불편한 이주민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의료·숙박·급식 시설을 제공하는 민간단체(NGO)다.

이 시설에서 지난 8일 방화로 추정되는 불이 났다. 불은 1층 무료급식시설을 모두 태웠고 2억원이 넘는 재산피해를 냈다.

전소(全燒)된 1층뿐만 아니라 의료센터가 있는 2층, 숙박시설이 있는 4층 등까지도 연기로 간접피해가 났다.

쉼터에서 거주하던 중국 동포 50여명은 현재 옆 건물에 임시거처를 마련해 놓고 생활하고 있다.

지구촌사랑나눔 건물 앞 천막에서 쉼터 이용자들이 가락시장에서 무료로 받은 채소를 다듬고 있다. © News1

추위가 한 풀 누그러진 16일 오후 지구촌사랑나눔 건물 앞에서는 채소 손질이 한창이었다. 멀리서 봤을 때는 화재 이틀 뒤인 10일 현장을 찾았을 때보다 상황이 한결 나아진 것으로 보였다.

향긋한 냄새를 기대하고 가까이 다가섰지만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채소를 손질 중인 한 할머니는 "가락시장에서 받아온, 납품시간이 안 맞거나 상태가 안좋아 못파는 채소들을 손질 중"이라고 했다.

갓, 청초, 시금치 등 십여박스 옆에서 채소를 손질 중이던 할머니는 "사실 이것들도 먹어야 하는데 너무 많아서 어차피 놔둬봤자 썩기 때문에 버린다"고 말하며 손질해서 걸러낸 채소들을 아까운듯 쳐다봤다.

건물 앞 천막을 지나 불이 났던 건물 1층 무료급식소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며 강영석 지구촌사랑나눔 사무국장에게 채소가 싱싱하지 않아 보인다고 묻자 "가락시장에서 상품가치가 없는 물건들을 무료로 보내주시는데 먹기에 괜찮고 위생상 문제가 없는 것들"이라고 답했다. "자금 사정이 좋으면 조금 더 싱싱한 것을 사서 쉼터 이용자들과 함께 먹으면 좋겠지만 지금은 화재로 인한 복구작업에 쓸 후원금도 없는 상황이라 이런 도움의 손길도 절실하고 감사하게 받고 있다"는 것이다.

무료급식소 안 공기는 여전히 매캐했다. 외관상으로도 일주일 전에 왔을 때보다 나아진 게 없었다.

강 국장은 "화재보험도 안 들었고 축적해 놓은 재원도 전혀 없는 상황이라 후원금으로만 복구비용을 충당해야 한다"며 "현재 후원금이 1억원 남짓 모이긴 했지만 복구를 시작했다 중간에 자금부족으로 작업이 중단되면 오히려 더 곤란해 질 수 있어 복구에 들 비용을 모으려고 기다리다 보니 작업을 시작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건물 안에선 반가운 '손님'도 눈에 띄었다. 정장을 입고 건물 내부를 휴대폰 카메라로 찍고 있던 남성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한화 케미칼 직원들"이라고 했다.

현장에 일부러 찾아왔느냐는 물음에는 "근처에 후원하고 있는 다른 아동단체를 찾아왔다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발걸음을 하게 됐다"며 "지금으로는 후원 여부가 확실치 않지만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8일 불이 난 지구촌사랑나눔 무료급식소는 복구작업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 News1

건물에서 나와 쉼터 이용자들이 임시거처로 쓰고 있는 옆 건물 '한국외국인력 지원센터' 3층으로 향했다.

10일 찾았을 때보다는 내부정리가 어느 정도 돼 있었지만 여전히 열악했다. 특히 날씨가 점점 추워지자 잠자리와 씻는 일이 문제다.

당뇨 때문에 시력이 나빠지고 발가락 세 개를 잃어 움직이기 힘들다던 중국 동포 전승범씨(59)는 "잠자리를 옮기니까 아무래도 불편하다"며 "오늘 아침 같은 경우는 맨바닥에 매트 하나만 깔고 자기에는 조금 추웠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자원봉사자는 "쉼터 방바닥은 전기선이 바닥으로 지나는 보일러가 설치돼 있어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 비교적 겨울을 따뜻하게 보냈던 편"이라고 귀띔했다.

전씨는 또 "일주일째 씻지도 못하고 있다"며 "옆 건물 4층에 있는 쉼터에 몇몇은 들어갔다가 세면도구라든지 옷가지라든지 가지고 나왔다고 하는데 나는 움직임도 불편하고 눈도 안좋아서 갈 엄두도 못 내고 있다"고 말했다.

임시거처로 사용하고 있는 3층에는 남·녀 화장실이 하나씩 있었고 샤워실은 없었다.

전씨와 이야기를 마치자 TV 앞에 앉아 있는 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이 남성은 두 발을 이용해 밤을 까먹고 있었다.

40년 전 중국에서 양팔을 잃었다는 중국 동포 최금호씨(46)는 "불은 났지만 (거처를 옮긴 뒤) 여기에 있는 시설들을 이용해 밥도 잘 챙겨주고 생활하는데 큰 불편은 없다"면서도 "저기(쉼터)는 편하고 따뜻했는데 여기서 맨 바닥에 매트하나 깔고 생활하려니까 옛날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최씨는 "주방 옆에 식탁이 있긴 한데 여기 머무르고 있는 40여명이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을 수 없어서 바닥에서 밥을 먹기도 하고 한다"고 덧붙였다.

지구촌사랑나눔에는 몸이 불편한 중국 교포 등 50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양팔이 없는 최금호씨가 발로 스마트폰을 조작해 영상을 보여주고 있다. © News1

임시거처에서 나와 강 국장이 있는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구촌사랑나눔이 들어서 있는 건물을 바라보고 왼쪽에 있는 건물에는 임시거처, 오른쪽 건물에는 임시사무소 등이 마련돼 있었다.

강 국장은 "건물 내 전기 임시복구 공사는 마쳤지만 매캐한 냄새가 온 건물에 퍼져있어 건물 안에서 생활이 힘든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지자 매캐한 연기 내음을 참고 본 건물 4층에 있는 쉼터에서 생활하려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강 국장은 "어제 같은 경우 옷 가지러 잠시 쉼터로 들어갔다 (임시거처는) 추우니까 연기냄새를 참고 거기서 자고 오겠다는 사람도 생기고 있는 실정"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어 "지금은 시설 이용자가 50여명이지만 겨울에는 쉼터에 150~200명, 급식소에 200~300명 등이 몰린다"며 "다음 주부터는 복구작업을 시작해야 겨울철에 대비한 김장이나 겨울철 급식사업 준비를 마칠 수 있을텐데"라고 한숨을 쉬었다.

한편 경찰은 CCTV 분석 등을 통해 지난 8일 지구촌사랑나눔 1층 무료급식소를 태운 불은 정신이상 증세가 있던 이 시설 이용자 중국 동포 김모씨(45)가 술에 취해 지른 것으로 결론지었다.

불을 지른 뒤 4층으로 올라간 김씨는 대피과정에서 1층으로 떨어져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다 12일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hwp@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