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논술형 수능 도입, 10년지대계가 필요한 이유[박남기의 미래 나침반]
박남기 광주교대 명예교수
서·논술형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도입과 관련해 국가교육위원회가 의견을 수렴해 결정할 것이라고 한다. 논의 과정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며 몇 가지 고려할 점을 제시한다. 수능은 대입전형의 한 요소다. 이 칼럼에서는 현행 대입제도 문제의 뿌리를 바라보는 관점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서·논술형 수능 도입 논의를 더 큰 틀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도 정착을 위한 전제조건도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필요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부작용만 커질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성공적인 정착에 필요한 전제조건과 제도 개혁 방식을 살펴보고, 이어 논란이 되는 채점 및 사교육 등과의 관계를 따져보고자 한다.
대입제도의 문제로 흔히 언급되는 것은 과도한 경쟁과 그로 인한 수험생의 고통, 그리고 높은 사교육비다. 그러나 실력주의 기조를 유지하는 한 입시제도 개혁만으로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학생들의 자해와 자살 문제가 제기되자 당국은 입시지옥을 완화하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라며 '학교에서의 입시교육 철폐, 입시 과목 축소, 입학시험에서 응용문제 출제 금지' 등의 대책을 발표한 바 있다. 이는 1934년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중학교 입시 대책이었다. 당시에는 중학교 입학 경쟁이 오늘날 대학 입학 경쟁보다 더 치열했다. 광복 이후 우리 정부도 대입과 관련된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이와 유사한 정책을 다양하게 시도해 왔으나 오히려 문제는 계속 악화해 왔다.
이러한 역사는 학생들이 느끼는 입시 압박이 입시제도 자체만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대입 전쟁'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 직업 세계의 이원화와 양극화로 인해 발생한 사회의 '전쟁'이 입시라는 벽에 비쳐 나타난 그림자다.
그렇다고 해서 대입제도 개혁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대입제도 개혁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는 교육전쟁 상황으로 인해 타당한 전형요소가 아니라 객관적인 전형 요소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현재의 수능은 학생의 고급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 등 대학 수학에 필요한 역량을 충분히 측정하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은 학창 시절의 귀중한 시간을 입시에 투자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고급 역량은 제대로 기르지 못할 수 있다.
서·논술형 수능 도입은 이러한 문제를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전쟁' 상황을 그대로 둔 채 서·논술형 수능을 도입하는 것이 타당하고 실현 가능한지, 또 기대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는 신중하게 따져봐야 한다.
도입하려는 서·논술형 수능이 기대한 효과를 거두려면 학교에서 이를 제대로 지도할 수 있는 여건부터 갖춰야 한다. 학생의 글을 읽고 오류를 진단하며 다시 쓰게 하는 개별 피드백이 논술 교육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학급 규모와 교사의 수업·채점 시간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평가 방식만 바꾸면 논술형 평가의 부담은 학교가 아니라 가정과 사교육 시장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교원 증원과 관련 프로그램 운영 예산 확보 등의 전제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학습이 뒤처진 학생을 위한 보충 프로그램도 내실 있게 운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제도에 적응할 책임이 고스란히 부모에게 전가되고, 계층 간 교육 격차는 더욱 커질 수 있다.
이미 고교학점제에서도 운용에 필요한 교사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해 제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교육위원회는 서·논술형 수능의 정착에 필요한 교육 여건 개선, 교원 연수, 보충 프로그램 운영, 교원의 근무 여건 보장 등에 필요한 교원 수와 예산을 추산해야 한다. 아울러 이를 확보하기 위한 대책까지 함께 마련해야 학생과 학부모, 교원, 일반 국민의 동의를 얻기 쉬울 것이다.
또 하나 필요한 여건은 사회통합전형의 의미 있는 확대다. 서·논술형 수능을 통해 고도의 역량을 측정하고자 하면 사교육 시장이 발달한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가 상대적으로 더 불리한 처지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이 문제를 완화하려면 의대를 비롯해 선호도가 높은 전공과 경쟁이 치열한 대학에서 사회통합전형의 비율을 사회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수준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리와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참고로 살펴보면 인도는 경쟁이 치열한 공대와 의대의 사회통합전형 비율이 50%에 달한다.
다만 사회통합전형은 단순히 선발 비율만 늘린다고 완성되는 제도가 아니다. 선발 이후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장학금과 학습 지원, 상담 등의 후속 대책도 함께 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통합전형이 또 다른 낙인이나 형식적인 제도로 남을 수 있다.
6년 후를 목표로 서·논술형 수능을 도입하면 새로운 제도에 빨리 적응하려는 심리 때문에 초기 사교육비가 증가할 가능성이 있다. 이를 완화하는 한 가지 방안은 적어도 10년 이후 도입을 목표로 추진하는 것이다. 학교와 학생, 학부모가 충분한 적응 시간을 갖게 되면 제도에 대한 불안과 학교의 지도 미비로 인한 사교육 수요를 어느 정도는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사교육비는 기초학력 보충형, 돌봄형, 예체능형, 그리고 경쟁 우위 점유형으로 나뉜다.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사교육비는 학생 실력을 기준으로 하는 한 대입제도 및 전형요소와 무관하게 줄이기 어렵다. 서·논술형 수능이 아니더라도 경쟁 우위 점유형 사교육비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가령 서울대 의대를 줄넘기 역량으로만 뽑는다고 하더라도 사교육비가 줄거나, 대입 경쟁률과 수험생들의 고통이 크게 줄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사회적 이익보다 자신의 손익을 먼저 계산하며 논쟁에 임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합리적인 제도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국민이 보다 합리적인 결정을 하게 하려면 제도개선으로 인해 손해나 이익을 보는 사람이 줄어들게 해야 한다.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한 미래형 서·논술형 수능 제도를 도입하면 지난 6년을 기존의 수능시험에 따라 준비해 온 학생과 학부모는 적응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 반대할 가능성이 높다.
교원도 마찬가지다. 짧은 시간 안에 학생들을 서·논술형 수능에 대비시키기가 어렵다. 교원의 적응 시간 부족, 새로운 제도 도입에 따른 업무 부담 완화책 미비 등이 겹치면 교원들의 반발도 커질 수 있다.
다양한 당사자가 이해관계를 떠나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제도를 도출하게 하려면 적어도 10년 이후의 정책을 논의해야 한다. 당장 자신의 문제가 아니고 준비와 대응을 위한 시간이 충분할 때,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기가 더 쉬울 것이다.
국가교육위원회는 사회적 합의에 기반한 중장기 정책 방향 등의 국가교육발전계획을 수립할 목적으로 설치됐다. 대입제도는 중기 정책이 아니라 10년 이후를 내다보는 장기 정책의 하나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0년 유예는 단순히 결정을 미루자는 뜻이 아니다. 10년 이후 도입을 목표로 단계적인 검증과 준비를 시작하자는 뜻이다. 1단계에서는 서·논술형 평가의 교육적 효과와 채점 신뢰도를 검증하고, 2단계에서는 희망 학교와 일부 과목에서 시범 운영하며, 3단계에서는 국가 수준의 성취 확인 평가로 확대하는 식의 로드맵을 마련할 수 있다.
아울러 제도가 뿌리내리는 데 필요한 교원과 예산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장기 정책에 대한 불안을 줄이고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쉬울 것이다.
서·논술형 수능 도입은 고급 역량을 측정함으로써 대입전형 요소의 타당성을 높이는 데 목적이 있다. 풀이 과정과 근거를 요구하는 서술형 문항은 논술형 문항에 비해 채점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그러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고부담 논술형 시험은 채점 여건이 갖춰지지 않으면 기대와 달리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고부담 평가에서는 응시자가 공정성과 신뢰성에 매우 민감하다. 채점 결과를 공개하고 이의제기까지 허용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타당성을 일부 희생하더라도 채점의 객관성과 일관성을 확보하려 할 수밖에 없다. 2009학년도 중등교원 임용시험부터 고급역량 측정을 위해 논술평가를 도입했으나 응시자가 4만 명을 넘는 시험의 채점 신뢰도 문제가 지속해서 대두됐다. 결국 전공 논술은 폐지하고 교육학만 논술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평가자 확보의 한계로 객관적인 채점 기준표에 따라 채점이 이뤄지면서 객관식 시험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응시자가 1만 명 미만인 초등교원 임용시험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나타났다. 교원임용시험 사례는 대규모 고부담 시험을 논술형으로 운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고부담 선발시험에서는 타당성만큼이나 객관성과 신뢰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채점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 그러나 아직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교원임용시험처럼 객관적인 채점 기준표에 따라 AI가 1차 평가를 한다면 막대한 예산을 들여 서·논술형 시험을 도입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반대로 AI가 주관적인 평가를 하도록 한다면 수험생과 학부모가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다. 단 한 번의 채점 오류만으로도 제도 전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안은 수능을 고등학교 졸업자격시험처럼 통과 여부를 가리는 저부담 시험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채점의 신뢰성과 공정성에 대한 부담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에 AI를 활용한 1차 채점도 제한적으로 검토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는 대신 대학별 평가가 당락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대학이 신입생 정원의 일정 배수 정도를 대상으로 논술형 평가를 실시한다면 전국 단위 시험보다 짧은 기간에 채점과 검증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별 평가가 자동으로 공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해 주는 것은 아니다. 대학별 평가를 허용할 경우에도 초기에는 공동 출제, 표준화된 채점 기준, 복수 채점, 외부 감독, 응시 부담 제한 등을 전제해야 한다.
이상의 여러 상황을 따져볼 때 현 초등학교 6학년의 대학 입시를 목표로 서·논술형 시험을 굳이 도입하고자 한다면 대학별 본고사에 적용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하지만 대학 본고사 도입은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고부담 선발에서는 평가 과정과 평가요소가 많아질수록 준비 부담과 정보 격차가 커질 수 있다. 사회적으로 합의 가능한 소수의 평가 기준을 명확하게 운영할 때 의사결정 비용과 수험생의 준비 부담을 함께 줄일 수 있음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정책은 가보지 못한 미래에 나타날 효과에 대한 예측을 기반으로 수립된다. 예측을 제대로 하려면 추구하는 목표의 타당성만이 아니라 처한 현실, 목표 구현에 필요한 여건, 여건 개선 가능성 등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살펴봐야 한다. 또한 논의를 진행할 때 학교에서 배우는 기본 개념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이 적지 않은 현실과 몇몇 전공과 일부 대학을 제외한 많은 대학이 신입생 충원에 어려움을 겪는 현실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서·논술형 수능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우선 학교와 저부담 평가에서 충분히 검증해야 한다. 교원과 예산, 채점 체계, 학생별 보충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시범 운영을 통해 교육적 효과와 부작용을 확인해야 한다. 그 결과가 축적된 뒤에야 일부 대학이나 일부 전공에서 제한적인 서·논술형 보완평가를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모든 학생의 고급 역량을 어느 정도까지 측정해야 하는지, 그렇게 해야 하는 근본 이유는 무엇인지, 실제로 구현할 수 있는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 청소년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고, 서·논술형 평가의 교육적 취지도 제대로 살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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