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칼럼] 인공지능 시대, 인류의 동지애가 필요한 때
이재영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제2차 세계대전 소재 미국 드라마로 유명한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마지막 회에는 어느 독일 장군의 인상 깊은 연설 장면이 나온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로 잡힌 독일군 병사들이 절망에 빠져있는데, 그 장군은 미군의 허락을 얻어 부하들에게 짤막한 고별 연설을 한다. 전우애로 고통을 함께 나누며 끔찍한 전쟁의 매 순간을 견뎌낸 병사들에게 여생을 평화롭게 살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살아남았으나 더욱 길고 고통스러운 미래를 맞이할 부하이자 동료들에게 담담하게 건네는 그의 위로는, 적군의 패장으로서 하는 말이지만 승자인 미군 병사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총부리를 겨누고 죽기 살기로 싸운 사이지만 비참한 전쟁에 휘말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견뎌냈다는 점에서 서로의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인공지능(AI)의 발전은 인류가 경험한 어떤 변화보다 속도가 빠르고 파괴적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SF 영화에서나 보던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 문제는 그 과정에 인간의 자리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점이다. 당연히 인간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인간 없이 작동하는 장면을 곳곳에서 보게 됐다. 일반 사무는 물론이고 회계사, 법률가, 의사 같은 전문직의 일도 이미 AI가 대체할 수 있다.
막대한 투자가 집중되는 피지컬 AI의 발전에 따라 조만간 제조 현장에서도 인간의 자리가 사라질 것이다. 심지어 AI를 연구 개발하는 역할도 AI에 넘겨주는 실정이다. 메타, 아마존, MS 등 빅테크 기업들은 매년 개발자를 수만 명씩 해고한다. 장밋빛 미래로 그려지는 AI 시대는 그런 점에서 인간에게 공포스러운 세계대전의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인간 노동력으로 하던 일을 산업혁명에 따라 기계가 대신하게 됐을 때나 컴퓨터 사용의 보편화로 전통적인 일자리가 크게 줄었을 때도 걱정과 달리 기술 발전으로 인해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생겼고, 이런 변화가 인간에게 오히려 이로웠다는 주장이 있다.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AI의 발전으로 인한 변화는 과거처럼 인간의 자리를 더 좋은 위치로 이동시키는 게 아니라 아예 지우게 되리라는 예측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우리는 개인 비서부터 공장 운영, AI 개발, 심지어 전쟁까지도 AI가 대신하는 시대에 이미 진입했다. 일론 머스크, 샘 올트먼, 마크 저커버그 등 글로벌 AI 기업 CEO들이 기본소득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건 그들도 인간의 자리가 사라지는 시대를 예견하기 때문이다.
AI 시대는 지킬과 하이드의 두 얼굴을 가진 모습으로 다가온다. AI 발전으로 인해 구현될 장밋빛 미래만 이야기하면 우리는 더없이 낙관적인 전망에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AI가 알아서 모든 일을 대신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스템을 작동하는 사회가 인간에게도 낙원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AI 전환을 자각적으로 단단히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은 인간에게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청년세대가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삶의 의욕을 잃는 게 단지 통상적인 경제 침체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시작된 이 거대한 구조적 변화를 우리는 20세기 초 세계대전이나 대공황에 직면했을 때보다 더 큰 위기의식을 갖고 총력을 다해 대응해야 한다.
사회 전체는 AI로 인한 변화의 흐름을 타고 빠르게 발전하겠지만 구성원 중 다수는 그 흐름에서 낙오하거나 상처 입고 고통받을 가능성이 크다. AI가 현란한 미래상을 우리 눈앞에 실현하거나 주식시장이 급등해 자산을 불렸다는 자랑이 곳곳에서 들려도 우리 이웃 중 다수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와 달리 하루하루를 힘겹게 분투하고 있다.
K자 형태의 심각한 양극화를 우리는 어느새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아무리 AI가 신통한 역할을 해도 이런 사회는 지속할 수 없다. 그러니 AI 시대에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필요한 건 자칫 낙오할지도 모를 이웃들을 보듬어 안고 함께 나아가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늙은 장군의 위로에 담긴 것과 같은, 험난한 세상을 함께 견디고 두려운 미래를 함께 헤쳐갈 전우이자 형제로서 우리 이웃을 바라보는 동지애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교육의 역할은 백 번 강조해도 부족하다. AI 시대에 학교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 그런 마음을 갖도록 훈련하는 공간이 돼야 한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미래를 지향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도록 지식과 정보를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 사회가 AI 발전으로 인한 파괴적 변화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걸 막도록 인류적 동지애를 함양하는 건 더욱 필요한 일이다. 이는 AI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역할이다. AI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데는 인간이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탁월하지만, 효율성을 넘어서는 인간의 가치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조만간 로봇과 기계가 농사의 상당 부분을 대신할 수는 있어도, 씨앗을 뿌리고 계절을 읽고 결실을 거두고 생명을 돌보는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지키는 건 인간이다. 인간이 배제된 채 AI만으로 빈틈없이 움직이는 '차가운 낙원'을 꿈꾸는 게 아니라면 AI 시대에도 우리는 인간의 가치와 역할을 묻는 '소는 누가 키울까?'라는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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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서울대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대학신문 부주간, 교무부처장, 학생처장, 기초교육원장, 인문대학장, 한국연구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특히 중등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국내 대표 중·고등학교 영어교과서(천재교육)의 대표저자이며 현재 한국영어관련학술단체협의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