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미래 교육의 디딤돌이 되려면 [기고]

[고교학점제 논란]③ 백승진 청주 신흥고 교사
'책임교육' 철학 살리기 위한 방향과 대안 마련해야

편집자주 ...시행 반년이 지났는데도 고교학점제를 둘러싼 논쟁이 뜨겁다. 하지만 무엇을 살리고, 바꿔야 할지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뉴스1은 고교학점제에 관한 실천과 연구 경험을 가진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와 함께 연속 기고를 마련했다. 3명의 전문가가 현장 경험과 쟁점, 앞으로의 방향을 살펴본다.

백승진 청주 신흥고 교사(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 정책위원장)

교육부는 지난달 25일 '고교학점제 운영 개선 대책(안)'을 내놓았다. 국가기초학력지원포털 구축, 전담교원 확충과 멘토링 확대, 최소 성취수준 보장 지도 유연화와 온라인 보충학습 인정, 출결·학생부 기재 부담 완화, 교·강사 확충과 공동교육과정 확대, 온라인학교 활성화를 통한 지역 격차 완화 등이 주요 내용이다.

전면 시행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학교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응급적 조치라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고교학점제의 출발점을 되짚어보면, 이번 대책이 단순한 단기 처방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고교학점제는 2017년 문재인 정부가 국정과제로 채택하며 본격 추진됐고, 고교체제 개편·내신 절대평가·성장 중심의 대입 개편과 긴밀히 연결된 장기 로드맵 속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들어 이러한 정책 연속성은 사실상 단절됐다. 외고·국제고·자사고의 일반고 전환 방침 철회, 내신 절대평가 전환 중단 그리고 학점제 교육과정과 어긋난 채 확정된 2028학년도 대입제도는 제도의 핵심 조건을 흔들었다. 오늘날의 혼란은 돌발적 사건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예견된 결과였다.

교사노동조합연맹,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관계자들이 5월 8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고교학점제 폐지 서명운동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뉴스1 ⓒ News1 임세영 기자
교육부 대책, 임시방편…교육 구조 전반의 전환 필요

교육부 대책은 전면 시행 6개월 동안 드러난 문제를 봉합하려는 현장 공감형 임시방편일 뿐 근본 해법과는 거리가 있다. 교원단체들은 '미이수제·최소성취수준 보장 지도 폐지', '정규 교원 확충', '선택과목 절대평가 전환', '과목별 출결 관리 폐지' 등 보다 구체적인 제도 개선을 요구한다. 무엇보다 시간강사 수준의 인력 보강으로는 제도 안착이 불가능하다며, 고교학점제가 '책임교육'의 철학을 살리려면 교육 구조 전반의 변화가 불가피하다고 강조한다.

현장의 비판을 단순히 변화에 대한 저항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목소리는 제도의 취지를 되살리고, 교육부와 교육청, 학교가 성찰과 개선을 모색하도록 자극하는 동력이 될 수 있다. 고교학점제 시행 과정에서 드러난 난맥상은 단순한 미비를 넘어 우리 교육의 입시 종속 구조와 누적된 불합리를 드러내는 징후다.

우리는 고교학점제가 입시 경쟁 구조에 경도된 한국 교육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이자 교육 정상화를 위한 전환점이 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고교학점제의 철학을 회복하고 지속 가능한 실행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학교와 교사가 실행 대상에서 실행 주체로 설 수 있도록 정책 실행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일이다.

학점 이수 기준, 책임교육 철학·평가 신뢰성 지켜야

학점 이수 기준은 책임교육의 철학과 평가 신뢰성을 지켜낼 수 있도록 명확히 설계돼야 한다. 성취율을 적절히 반영하되 온라인 보충학습, 맞춤형 지원, 평생학습 및 학점은행 시스템을 결합한 재이수 제도 등 정교한 안전망 체계를 설계해야 한다. 아울러 농산어촌과 소규모 학교가 대도시 학교와 동등한 교육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교육지원청과 고교학점제 지원센터의 역할을 강화해 지역 간 과목 개설, 진로·학업 지도 격차를 줄여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두 가지 과제가 핵심이다. 첫째, 대학입시 제도와의 정합성 회복이다. 2028 대입 제도 개편안이 표방하는 변별 중심 내신과 대입 전형 체제가 지속되는 한 학생 선택 중심 교육과정과 성취기준에 근거한 교수학습평가의 영역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 내신 절대평가와 학생의 다양한 역량과 성취 과정을 반영하는 대입 제도로의 개편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둘째, 교원 수급·배치 체계의 근본적 개편이다. 학생 수 중심의 정원 산정으로는 학생의 학업 성취도와 진로·적성에 따른 다양한 과목 개설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 선택 과목 개설 수와 학급 규모를 반영한 새로운 교원 배치 원칙, 순회교사·전담교사·전문강사가 결합한 다층적 인력 지원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고교학점제 수업 중인 서울 한 고등학교 모습. (뉴스1DB) ⓒ News1 신웅수 기자
학점제, 학생을 교육의 중심으로 세우는 구조적 개혁

고교학점제의 가장 큰 의의는 모든 학생을 교육의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끌어올린 데 있다. 그동안 평가와 진로 설계의 변방에 머물렀던 느린 학습자, 기초학력 미달 학생, 학생 선수들까지 교육과정의 주체로 서게 한 것이다. 고교학점제는 단순한 학사제도의 변화를 넘어 고등학교 교육을 '학생 주체성' 위에 새롭게 세우려는 구조적 개혁이자 한국 교육이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중대한 시험대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마주한 질문은 분명하다. 고교학점제를 책임 있는 미래 교육 체제로 안착시키기 위해 남은 과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교육부의 정책 설계, 학교 현장의 실천, 사회적 합의가 긴밀히 맞물릴 때 비로소 교육정책은 힘을 얻는다.

고교학점제는 완성된 답안지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써 내려가야 할 열린 미래다. 돌 하나로는 강을 건널 수 없지만, 여러 개의 돌이 놓이면 누구나 물살을 건널 수 있다. 고교학점제는 그 첫 번째 디딤돌이며, 지금 우리가 놓아야 할 것은 다음 돌이다. 이제 질문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물살을 건널 준비가 돼 있는가?

jinn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