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지학순 주교 조카 재심 청구 배제' 형소법 조항 헌법불합치

과거사 사건 재심청구권 제한 제동…내년 말까지 개정해야

김상환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 자리하고 있다. 2026.3.26 ⓒ 뉴스1 구윤성 기자

(서울=뉴스1) 서한샘 기자 =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수감 생활을 했던 고(故) 지학순 주교 사건에서 조카를 재심 청구권자에서 제외한 형사소송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헌법재판소 판단이 나왔다.

헌재는 24일 형사소송법 제424조 제4호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7대 2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했다. 해당 조항은 내년 12월 31일까지 입법자가 개정할 때까지 계속 적용된다.

심판 대상 조항은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사망했거나 심신장애가 있는 경우 배우자, 직계친족 또는 형제자매가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조카나 제수 등은 재심 청구권자에 포함되지 않는다.

헌재는 이 조항 중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이 사망한 경우에 관한 부분 가운데 과거사정리법상 민간인 집단희생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조작의혹 사건에 적용되는 부분이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다만 여순사건 희생자의 제수인 청구인 1명에 대해서는 헌법소원 제기 뒤 희생자 동생이 재심을 청구해 무죄판결이 확정된 만큼, 재판의 전제성이 인정되지 않는다며 각하했다.

헌재는 지 주교의 조카를 포함해 여순사건 희생자 유족 등이 낸 총 3건의 헌법소원 사건을 심리했다.

지 주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대통령긴급조치 위반, 내란 선동,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선고받았다. 지 주교는 1993년 3월 사망했다.

이후 대통령긴급조치에 대한 대법원과 헌재의 위헌 판단이 나오자, 검찰은 형사소송법에 따라 재심을 청구했다. 다만 검사의 재심청구에는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관한 재심사유만 포함됐고, 내란 선동과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는 심리되지 않았다. 재심 법원은 긴급조치 위반 혐의에 대해서만 무죄를 인정했다.

지 주교는 천주교 성직자로 직계비속이 없고 직계존속도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이에 3촌 조카인 청구인이 나머지 혐의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려 했지만, 법원은 청구인이 형사소송법상 재심 청구권자가 아니라며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청구인은 서울중앙지법에 형사소송법 제424조 제4호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지만 기각되자, 2021년 9월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함께 심리된 '여순사건' 관련 헌법소원 2건도 같은 조항이 쟁점이 됐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돼 포고령 위반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뒤 한국전쟁 초기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법적 절차 없이 살해된 희생자들의 조카와 제수 등은 재심을 청구했지만, 배우자·직계친족·형제자매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각되자 헌법소원을 냈다.

헌재는 재심 청구권자를 배우자·직계친족·형제자매로 한정한 것 자체에는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봤다. 그러나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조작 의혹 사건은 국가기관이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사후에도 진실규명 활동을 억압한 것으로, 일반 형사사건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이 같은 과거사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혼인하지 않은 채 사망하거나 온 가족이 희생되는 등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로 적법한 재심 청구권자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경우가 다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수십 년이 지나 진상이 밝혀진 뒤에는 배우자·직계친족·형제자매마저 사망한 경우도 빈번하다고 봤다.

헌재는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과 중대한 인권침해·조작 의혹 사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심판 대상 조항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만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정당하고 적정한 재판이라는 법치주의의 또 다른 이념을 도외시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형사소송법은 배우자, 직계친족 또는 형제자매가 없는 경우에도 검사가 재심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국가의 조직적인 위법행위로 이뤄진 사건의 권리구제를 국가에만 전적으로 맡겨두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다만 헌재는 단순 위헌 결정하면 해당 과거사 사건에서 기존 재심 청구권자인 배우자·직계친족·형제자매도 재심을 청구할 근거가 사라져 법적 공백이 생긴다며 헌법불합치 결정을 했다. 재심 청구권자 범위를 넓힐지, 친족이 검사에게 재심청구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할지 등은 입법자가 정할 문제라고 봤다.

한편 정형식·조한창 재판관은 반대의견을 냈다. 이들은 "심판 대상 조항이 망인과의 관계를 고려해 재심 청구권자를 가까운 친족으로 한정하고 있다"며 "이는 자의적 입법이라고 보기 어렵고, 검사에 의한 직권 재심청구도 가능하다"고 합헌 의견을 냈다.

saem@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