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소원 무더기 '입구컷'…문턱 높은 본안 회부 '청구 남발' 막을까

재판소원 12일만 첫 판단…26건 무더기 각하, 본안 회부는 '0'
"쉬운 인용 땐 사법 체계 붕괴"…법조계 "제도적·입법적 보완 시급"

24일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게양대에 걸린 헌법재판소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다. 2026.3.24 ⓒ 뉴스1 박정호 기자

(서울=뉴스1) 최동현 서한샘 기자 = 헌법재판소가 24일 재판소원 청구 사건들 중 일부를 1차적으로 사전심사 단계에서 모두 각하했다. 절차적 하자를 이유로 사건을 본안에 넘기지 않고 '입구 컷'을 한 셈인데, 사실상 4심제인 재판소원의 높은 문턱이 증명된 만큼, 재판소원 남발이 방지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본안 회부 0건"…헌재 첫 판단은 '무더기 각하'

헌재 지정재판부는 이날 제2호 재판소원인 납북귀환 어부 유족의 '형사보상 지연 국가배상 청구 기각 취소 사건'을 비롯해 총 26건의 청구를 각하 결정했다고 밝혔다. 지난 12일 재판소원 제도가 시행된 이후 헌재가 내린 첫 판단으로, 이날까지 접수된 총 153건의 사건 중 26건을 우선 '무더기 각하'한 것이다. 본안심판에 회부된 사건은 0건이다.

재판소원은 법원의 확정판결에 대한 기본권 침해 문제를 다투는 헌법소원심판의 일종이다. 사전심사에선 청구 요건 등 '절차적 요건'을 따져보고, 이를 통과하면 본안심판에 회부돼 재판관 전원이 심리·결정한다. 사전심사를 넘지 못하면 정식 심리를 받을 수 없는 구조다.

지정재판부의 대표적인 각하 사유로는 △다른 법률에 따른 구제 절차를 모두 거치지 않은 채 헌법소원을 청구한 경우 △헌재법상 청구 기간(판결 확정 뒤 30일)을 넘긴 경우 △대리인을 선임하지 않은 경우 등이 꼽힌다.

법조계는 제1호 재판소원 청구 사건인 '시리아 외국인 강제퇴거명령 및 보호명령 취소 사건' 등 나머지 심리 사건도 각하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1호 사건은 지난 1월 8일 대법원에서 원고 패소가 확정됐다. 재판소원 청구 시점인 이달 12일은 이미 판결 확정일로부터 60여일이 지난 상태였다.

24일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민원실에 '헌법재판소법 일부개정법률' 일명 재판소원 시행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다. 2026.3.24 ⓒ 뉴스1 박정호 기자
4심제 '엄격 잣대' 시사한 헌재

법조계에선 헌재가 재판소원의 사전심사는 물론, 본안심판에도 '깐깐한 잣대'를 들이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재판소원 결정으로 법원의 확정판결이 수시로 뒤집힐 경우 기존 3심제(원심→항소심→상고심) 체계였던 대한민국 사법체계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헌재 연구원 출신인 정태호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재판소원은 재판 과정에서 기본권이 침해됐냐를 들여다보는 헌법심인데, 이는 (종전) 재판부가 살폈어야 할 기본 사항"이라며 "재판소원으로 (확정됐던) 법원 판결이 번번히 깨지면, 이는 한국 사법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했다.

재판소원 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하급심과 대법원의 확정판결은 불변의 '최종 판단'으로 받아들여졌다. 정치권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서도 대법원 판결은 존중의 대상이었다. 자칫 법원 확정판결에 대한 의구심이 확산하면, 사법부 권위는 물론 국가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꺼질 수 있단 지적이다.

정 교수는 "헌재가 (재판소원 입법 취지에 대한) 기대감을 채워주기 위해 무리하게 법원의 확정판결을 파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매우 엄격한 기준으로 사건을 심리해 기본권 침해가 명백한 청구 사건에 대해서만 극히 이례적으로 (청구 인용을) 결정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우리나라 재판소원 제도 설계의 모델인 독일은 재판소원 인용률이 1%대에 불과하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12일(현지 시각) 발간한 2025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재판소에서 심리한 재판소원 4151건 중 인용된 사건은 49건(1.1%)에 그쳤다. 전년인 2024년엔 0.8%로 더 낮았다.

헌재가 재판소원 청구 사건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궁극적으로 '기본권 침해 구제'에 이롭다는 시각도 있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독일의 경우 전체 헌법소원심판 중 재판소원의 비율은 80%가 넘는다"며 "가뜩이나 업무 과중인 헌재가 재판소원 사건을 거르지 않고 모두 심리할 경우, 세세하고 정치한 판단이 물리적으로 어렵지 않겠나"라고 반문했다.

24일 서울시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으로 관계자가 지나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는 이르면 이날 지정재판부 재판관 평의를 마친 일부 재판소원 사건에 관해 각하 또는 심판 회부 여부를 내놓을 것으로 전망된다. 2026.3.24 ⓒ 뉴스1 박정호 기자
"재판소원 안착하려면 입법·제도 보완 시급"

법조계와 학계에선 재판소원 제도의 안착을 위해 중장기적인 입법적·행정적 설계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충분한 준비 기간을 두지 않고 서둘러 시행된 제도인 만큼, 헌재의 인력·조직 확충과 재판소원 심판 대상에 대한 보완 입법, 대법원과 헌재의 권한 및 위상 정립 등이 대표적이다.

헌법학 권위자인 장영수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재판소원에 대한 헌재의 태도에 대해 "청구 사건이 어느 정도 쌓여야 경향성을 가늠할 수 있다"면서도 "(재판소원의) 사전심사 대상을 엄격하게 해서 (각하 사건을) 사전적으로 걸러내는 효과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장 교수는 재판소원 사건 급증에 대비한 입법적·행정적 보완도 주문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개헌을 통해 독일과 스페인처럼 헌재에 두 개의 전원재판부를 둬서 사건 처리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했다.

장 교수는 헌법재판관 임용 규정 개선 등 제반 여건도 달라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재판소원 사건이 인용돼 확정판결이 뒤집힐 경우, 다시 사건이 대법원으로 파기환송 될 가능성이 높다. 대법원과 헌재가 동등한 위치인 현행 제도에선 양 기관의 '핑퐁 싸움'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게 장 교수의 생각이다.

장 교수는 "헌재가 (확정판결이) 틀렸다고 뒤집어봤자, 대법원에서 원심대로 판결하겠다고 하면 결국 핑퐁 싸움만 되고 국민들만 힘들어진다"면서 독일처럼 헌법재판관의 일정 비율을 대법관 출신으로 임명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dongchoi89@news1.kr